본편 7

본편로그(앞부분) 2015. 3. 3. 15:16

~짤 준비중~



"부자라는 말은 그만 쓰도록 하자."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




 

"좋아, 카를. 프레드의 책을 읽으면서 근사한 대답이 떠올랐는데, 문을 열자 집주인 카를과 마주치는 바람에 깨끗이 잊어버렸다 이거지."

"바로 그거야."

"변명을 하려면 좀 더 창의적으로 해 봐!"

로자의 허탈하다는 듯한 말투에 카를은 어깨를 으쓱했어요. 변명이 아니라 사실인걸요. 한참을 잊고 있었던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오는 위압적인 외모의 집주인보다 더 집중을 방해하는 존재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요?

"나도 노력은 했어. 평소에 스스로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상식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데까진 생각해 봤지. 어, 음, 그리고, 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순 없다는 생각도 들었달까..."

사실 마지막 문장은 적당히 주워섬긴 거였어요. 보통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건 교회이기 마련인데, 프레드 씨의 책에는 교회 얘기가 없었기 때문이죠. 뜻밖에도 로자는 카를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표정을 폈어요.

"제법인데, 카를! 아주 게으름 피우던 건 아니었나봐? 맞아,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하지. 교회의 사제들 말에 충실하게 살면 신이 그들을 구원해줄 거라고 생각하거든. 힘든 현실을 잊게 해주는 마약 같은 거야. 실제로는 신은 허상일 뿐이고 사제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받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동맹군 중 한 사단일 뿐인데 말이야."

자기가 하려던 말은 그냥 교회에서 주는 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얘기였는데, 어쨌든 로자가 좋아하니 다행이라고 카를은 생각했어요. 로자의 말도 과격하고 처음 들어보는 소리이긴 하지만 아예 있을 수 없는 얘기는 아닌 것 같았지요. 카를과 다른 개구장이 아이들을 귀여워해 주시던 동네 목사님의 상냥한 얼굴이 떠올라서 좀 죄송스럽긴 했지만요.

"그래, 인간은 신이 만든 게 아니라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거니까.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신의 힘을 믿고 기대기엔 과학이 너무나 발달해 버렸어."

카를은 그럴듯하게 덧붙였지만 사실 로자의 말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어요. 사제들이 "동맹"이라는 건 무슨 말일까요? 몇몇 부패한 사제들(특히 옛날식 사제들 말이죠!)을 제외하고, 선량하고 검소한 보통 사제들이 대체 누구와 손을 잡고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는 건지 카를은 짐작도 할 수 없었어요. 교회가 사람의 의식주를 도와주지 못할 수는 있어요. 땅 위에는 천국도, 신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착하고 바르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 아니겠어요? 애초에 교회의 본래 목적은 사람들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걸 돕는 건데 말이에요.

카를이 두 사람 모르게 교회와 사제들에 대한 생각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로자는 에두아르트에게도 질문을 던졌어요.

"에데도 말해봐. 책을 읽으면서 뭔가 새로운 걸 발견했어? 너랑 카를의 말 중에서 틀린 곳이 있었니?"

에데는 로자가 가리키는 칠판의 글씨들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어요.

"내가 부자들이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보다 나쁜 게 아니라고 한 건 여전히 맞다고 생각해. 세상엔 로빈 이야기에 나오는 나쁜 영주같은 부자는 많지 않아. 대부분은 성실하게 자기 할 일을 하며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살리고 일꾼들에게 급료를 주는 평범한 이웃들이지. 

하지만 프리드리히 씨의 말도 틀리지 않아. 공장이나 회사를 가진 부자들은 나쁜 의도가 있든 없든, 결과적으로는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데?"

"...열심히 일하는 건 일꾼들인데, 돈을 버는 건 부자들이니까?"

에데는 자기가 말해 놓고도 좀 유치한 말인 것 같아 살짝 머쓱해졌어요. 물론 열심히 일한 건 일꾼들이지만, 밑천을 들여 일거리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건 공장이나 회사의 주인들인걸요. 은행에서 일하면서 많이 봤지만, 워낙 큰돈이 밑천으로 들어가다 보니 사장 노릇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두 사람이 가만히 있자 에데는 자기가 한 말을 수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음, 방금 건 좀 이상했어. 밑천이 크면 돈을 많이 버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이상하지 않았어, 에데. 조금 전에 한 말이 맞아. 카를도 같이 생각해 봐. 밑천을 댄 사람이 돈을 많이 버는게 옳을까? 아니면 일을 열심히 한 사람이 돈을 많이 버는게 옳을까?"

"그야 돈낸 만큼 벌고 일한 만큼 버는 게 맞는 거 아냐?"

"보통은 네 말대로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카를. 그럼 얼마만큼이 '돈낸 만큼'이고 '일한 만큼'인지는 누가 정하는 걸까?"

"글쎄, 부자들이겠지." 카를이 대답했어요.

"적어도 일꾼들이 정할 것 같지는 않은데." 월급날 받던 빠듯한 액수를 떠올리며 에데도 거들었어요.

"좋아, 좋아. 많이 발전했어. 이쯤에서 우리 부자라는 말은 그만 쓰도록 하자."

로자의 다소 갑작스런 제안에, 카를은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양손을 들어보였어요. 에데도 말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요. 로자는 듣기 좋게 또박또박 설명해 줬어요.

"너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익숙한 표현을 썼는데, 슬슬 정확히 해둬야지. 공장이나 회사를 갖지 않고도 부자인 사람들이 있으니까 말이야. 작은 공장이나 회사를 가진 사람들은 생각보다 부자가 아니기도 하고. 게다가 부자와 빈자라는 표현은 그 둘을 가르는 기준도 너무 애매해. 지금부터는 자기 밑천을 들여 공장이나 회사를 소유한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물주'라고 하는거야."  

"물주...말이지." 카를은 공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단어를 되풀이했어요. "좋아, 외웠어."

"슬슬 주제가 헷갈리기 시작하는데, 우리가 얘기하던 데로 돌아가 보면 안될까? 부자, 아니 물주들이 나쁜지 아닌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 에데가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보다 물주들이 돈을 많이 버는 건 나쁜 일이라고 얘기했어. 그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착한 사람들이고, 나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말이야. 그럼 이제, 왜 그게 나쁜 일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차례야. 에데, 네가 말을 꺼냈으니 왜 그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말해줄래?"

"그건..."

에데는 다시 말문이 막혔어요. 사실 그다지 학문적이지는 않은, 단순한 느낌에 따라 말한 것일 뿐이거든요. 로자와 카를과 이야기하면서도 우유병을 깨뜨려서 내일은 다시 오지 않을 꼬마 배달부, 그 소년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어요. 만약 그 마른 아이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도 고용주가 정한 작은 액수의 수당만 받으며 고달프게 살다 이윽고 일을 못할 만큼 몸이 약해져서 죽는다면...

"...공평하지 못하니까."

에데의 말에 카를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어요.

"그럼 물주들이 일꾼들과 함께 번 돈을 모두 모아 서로에게 똑같이 나눠줘야 한다는 거야? 그러면 공평하다는 거야?"

"그럼 프리드리히 씨의 책에 나온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검댕투성이가 되어서 일하다가 부자가 되어보지도 못하고 일찍 죽어버려도 된다는 거야? 그 사람들도 처음부터 밑천을 갖지 못했다는 걸 빼면 물주들이랑 똑같이 평범한 이웃들인데, 이게 공평하단 말이야?"

"만약 어떤 물주가 원래는 일꾼이었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자기 공장을 차린 거면 어쩔건데? 그걸 뺏어서 아직도 가난한 다른 일꾼들한테 줄 거야? 설령 일꾼이 돈을 벌어서 물주가 된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물주 집안에 태어났다고 해도 그건 안 돼. 훔친 게 아니라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게 죄는 아니잖아. 일꾼들이나 물주들이나 죄짓지 않은 선량한 사람들인 건 마찬가지야! 모두들 법으로 재산을 보호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법이야말로 모든 사람한테 공평한 사회의 기준 아니었어?"

카를은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었어요. 저도 모르게 어느새 큰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죠. 만사에 느긋하고 싸움을 싫어하던 자신이 만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친구한테 이렇게 몰아붙이듯이 말을 하다니. 에데가 혹시나 기분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돼서, 카를은 슬쩍 에데의 눈치를 봤어요. 에데가 기가 죽었거나 화를 내고 있으면 재빨리 사과할 셈이었죠. 에데는 살짝 눈썹을 찡그리고 아래를 보고 있었어요. 역시 기분이 나빴구나 싶어서 카를이 미안하다고 하려던 차에, 에데가 고개를 들었어요.

"만약에 법이 공정하지 못하다면? 실제로는 나쁜 결과를 불러오는 일인데 법으로 처벌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걸 지켜주는 법을 만든 거라면? 카를, 프리드리히 씨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라."

에데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지만 점점 목소리가 들뜨고 빨라졌어요. 후다닥 말을 마치고 나서는 두 사람이 말하는 걸 지켜보고 있던 로자 쪽을 돌아봤지요.

"로자, 내 말이 맞는 것 같아?"

로자는 생긋 웃었어요.

"첫 숙제치고는 괜찮은걸."

에데는 겸손하게 웃어보였어요. 은행에서 상사나 손님들에게 칭찬을 들을 때마다 지어서 익숙한 표정이었죠. 로자에게 미소로 답례를 표시하고, 에데는 허를 찔린 듯 멍하니 있던 카를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어요. 

"법이라는 힌트 고마워, 친구!"

"뭐, 뭘..."

"너무 기죽지 마, 카를. 에데의 대답도 완벽했던 건 아니니까. 내가 보기엔 운이 좋았어."

로자가 <서쪽 나라 일꾼들의 실태>를 책꽂이에 밀어넣으며 말했어요. 로자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지만, 카를은 역시 조금은 아쉬웠어요. 로자가 말한 대로 상식을 깨보려고 했는데, 결국 카를은 법은 옳은 것이라는, 상식이라기에도 다소 부족한 틀에 갇혀 실패한 셈이니까요. 중학교에서도 아주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는데, 첫 수업부터 이래서야 앞으로 잘 따라갈 수 있을지 카를은 살짝 걱정이 되었어요.

"생각도 연습이 필요한 법이거든. 오늘부터 며칠간은 쉬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하는 연습을 하는 단계야. 체육으로 따지면 준비운동 시간인 거지."

로자는 책꽂이의 다른 칸을 향해 걸어가더니, 큼직한 책을 역시나 세 권 꺼냈어요. 첫 번째 책처럼 살짝 빛이 바랜 표지에는, 알록달록한 그림과 함께 큼지막한 활자로 제목이 적혀 있었어요.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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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r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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