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8

본편로그(앞부분) 2015. 3. 21. 02:39

~짤 준비중~



"청춘의 꽃도 같이 썩어죽게 생겼다고."

<야외 수업>




 

"동화책 아냐 이거?"

책을 들고 앞뒤로 살피며 카를이 말했어요. 설마 내가 너무 수준 낮은 말만 해서 교재 수준을 낮춘 건가 싶어 불안해졌지요. 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어요.

"맞아, 동화책이야. 이거는 지금 읽으라는 건 아니고, 두 번째 숙제. 내일 오전수업까지 읽어오면 돼."

"아까 그 책은 이걸로 끝이야? 좀더 천천히 읽어보고 싶은데."

"제자리에 갖다 놓기만 한다면 마음대로 가져가서 봐도 돼! 그러라고 있는 서재인걸."

로자가 허락하자 에데는 책꽂이로 걸어가 로자가 꽂아놓은 <서쪽 나라 일꾼들의 실태>를 다시 꺼냈어요. 카를은 자기도 그렇게 할 걸 그랬나 싶었지만, 괜히 의식하고 따라하는 걸로 보이긴 싫었기 때문에 일부러 신경쓰지 않는 척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를 훑어보았지요. 아무래도 동화책이다 보니 중간중간 큼직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날카롭고 정돈 안 된 펜선으로 그려진 걸어다니는 고양이는 색조합도 심란하게 칠해져 있어서 어린이용 책 치고는 실험성이 다소 과했지요. 카를도 취미로 그림을 좀 그려본 터라, 얼마나 화가에게 줄 그림값을 후려쳤을까 하는 생각에 한숨부터 나왔어요.

"왜 그래 카를? 생각보다 어려워 보여?"

에데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책을 내리면서 물어봤어요. 카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고 책 내용을 조금 훑어보다가, 지금은 그러면 뭘 해야 하나 싶어 로자에게 물어봤어요.

"이 책은 숙제랬잖아, 나중에 읽으면 되는 거랬지? 그럼 지금은 뭘 하면 되는 거야?"

"으흠, 안 그래도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참이었어. 점심 먹기엔 좀 이른데."

"공부하고 남은 시간엔 쉬면 되는 거 아냐? 로자 넌 평소엔 뭐 하고 놀아?"

"나? 그냥 다른 여자애들이랑 비슷하지 뭐. 책도 읽고, 편지도 쓰고, 가끔은 나가서 꽃이나 새도 보고."

카를이 웃으면서 진짜 평범한 아가씨들은 논다는 말을 그런 뜻으로 쓰지 않는다고 하려던 찰나, 에데가 카를에게 프레드 씨의 책을 내던졌어요.

"그래 그거야! 꽃이나 새 보는거 좋지. 집 밖으로 나가자!"

카를은 얼떨결에 두 손으로 책을 받느라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를 떨어뜨릴 뻔했어요.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에데의 제안은 카를 입맛에 꼭 맞았지요.

"밖으로? 아직 수업시간인데...뭐 좋아, 밥 먹고 공부만 하며 지낼 순 없지."

카를이 맞장구 치자 에데가 미소지으며 주먹을 내밀었어요.

"이래야 내 친구답지." 카를이 에데와 주먹을 마주치자 로자는 팔짱을 꼈어요.

"손발 착착 맞는거 봐! 이봐 에데, 좀전엔 프레드 책이 좀 더 읽어보고 싶다느니 했으면서, 그건 그냥 제스쳐였던 거야?"

"나가서 읽으면 되지. 솔직히 이 서재, 학문이 꽃피기엔 너무 어두침침하잖아?"

"청춘의 꽃도 같이 썩어 죽게 생겼다고. 에데 말대로 하자! 로자, 집 근처에 어디 소풍갈 만한 데 없어?"

"집에 처음 올 때 숲 우거진거 못 봤니? 소풍은 무슨."

로자는 고개를 모로 저으면서도 의자를 집어넣고 일어섰어요. 그리고 카를의 손에서 <서쪽 나라 일꾼들의 실태>를 뺏어 에데에게 흔들어 보이며 말했지요.

"야외수업은 허락해 줄게. 하지만 이건 소풍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업인거, 명심해!"

"너무해, 아까는 쉬는 시간이랬잖아!"

로자는 단호한 손길로 에데에게 동화책을 내밀었어요.

"프레드에게 너희를 가르칠 막중한 책임을 위임받은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줘. 수업 첫날부터 농땡이 피웠다는 평가를 받고 싶진 않다고. 이제부터는 점심 겸 예습시간이야! 간단히 먹을 것 좀 챙겨가서 같이 이 책을 읽는거야."

에데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받아들었어요. 말은 쉬는 시간이 아니라 수업이라니 너무하다고 했지만, 밖에서 식사하며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것 같았지요. 카를은 벌써 동화책을 챙겨들고 서재 문을 열고 있었어요.

"나랑 에데는 이대로 바로 나가면 돼! 로자, 옷 갈아입고 올 거지? 우리가 부엌에 가서 뭐라도 가져올까?"

"아니, 나도 이 차림 그대로 나갈거야. 내가 집 주변에 소풍갈 만한 곳은 없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찾아낸 곳이 있는데, 맨 꼭대기 다락방으로 가면 지붕으로 바로 나 있는 큰 창문이 있어. 거길 통해서 지붕으로 나갈 수 있는데, 거기서 수업할 거야."

"지, 지붕?"

"걱정 마, 경사가 아주 완만해서 씨름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굴러떨어질 일은 없을거야."

 로자는 자기 몫의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를 카를 손에 맡기면서 복도로 나갔어요.

"난 부엌에 가서 렌헨한테 도시락을 부탁할 테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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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거 굉장한데!"

카를은 로자가 일러준 대로 다락방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자마자 탄성을 질렀어요. 집안에 있을 때는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던 주변 경치가 시원하게 트여 보였거든요! 호수처럼 넓게 자리잡은 숲은 느긋하게 경사를 이루며 내려갔고, 그 끝에는 카를과 에데가 떠나온 도시의 지붕들이 펼쳐져 있었지요. 눈을 가늘게 뜨면 좀 더 멀리 공업지대의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도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에데가 다락방에서 가져온 담요를 건네받아 먼지를 털면서, 카를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어요. 

"서재에 책먼지가 은근히 많았나봐, 바깥 공기가 아주 상쾌해!"

"숲속이라 그럴거야, 아마. 기껏해야 몇 마일 안 되는 거리일텐데 도시랑 비교도 안 되게 공기가 깨끗한걸."

에데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자, 담요를 지붕에 전부 깐 카를이 뻗은 손을 잡고 끌어올려 주었어요. 곧 로자가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지요. 로자에게 바구니를 건네받은 카를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어요.

"너 실수한 거야, 로자! 순순히 식량부터 넘겨주다니, 우리가 도시락 욕심에 널 버리고 가면 어떡하려고 그래?"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렌헨이랑 같이 다락방 창문을 못박아 버릴거야."

로자도 피식 웃으며 받아쳤어요. 카를과 에데가 뻗어주는 손을 한 짝씩 잡고 올라온 로자는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며두 사람 사이에 자리잡았지요. 로자가 도시락 바구니를 끌어당겨 흰 보자기를 벗기자, 두 청년은 양옆에서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어요.

"세상에 로자, 이거 전부 렌헨이 만든거야?"

"응, 맞아. 렌헨은 정말이지 우리 집의 집정관이야! 렌헨 없인 카를도 프레드도 아무것도 못할걸."

두꺼운 종이에 통째로 싼 넓적다리 햄과 치즈 덩어리들, 적포도주 병, 아마도 버터가 들어있을 도자기 그릇, 작고 예쁜 휴대용 병에 담긴 나무딸기 잼에다 황금색 껍질이 먹음직스러운 파이까지─카를은 사과파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셋이 먹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칠 만큼 많았지요. 제일 놀라운 건 이제 막 구운 듯 따뜻함이 남아있는 빵이었어요. 빵은 빵가게에서 사먹는 건줄로만 알았는데! 에데는 동그라니 먹음직스러운 빵을 집으려다 혹시나 싶어서 재킷 자락에다 손을 문질러 닦았어요. 로자는 어느새 익숙한 손길로 코르크 마개를 따고 있었지요. 

"잔 챙겨오는 걸 깜빡했네. 렌헨이 보면 화내겠지만, 그냥 입 대고 마셔."

"이야아, 이거 대담한 아가씨네? 설마 카를 씨나 프레드 씨의 수집품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무슨 소리야! 이건 내 용돈을 쪼개서 산 거거든? 나도 와인은 하루 한 잔씩만 마시는데 특별히 너흴 위해서 가져온 거야! 고맙게 여기진 못할 망정!"

로자는 깔깔 웃으며 코르크 따개로 카를의 옆구리를 쿡 찔렀어요. 으윽, 로자리우스 너마저...카를은 거품 무는 흉내를 내며 에데가 정성스레 잘라 놓은 치즈 한 조각을 쏙 집어먹었어요.

"야, 카를! 로자리우스, 저 도둑놈을 해치워 버려!"

"우물우물....너희들의 알량한 버터칼로는 이 카를 님의 겉옷 한 장 잘라낼 수 없도다....아, 이거 사과파이네"

시끄럽게 떠들고 까불며 놀다 보니 어느새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어요. 산처럼 많아보이던 도시락도 어느새 햄 덩어리를 빼곤 거의 다 먹어치워 버렸지요. 따뜻한 오후 햇살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어서, 카를은 그만 지붕 위에 드러눕고 말았어요.

"졸리다..."

"카를, 자면 안돼! 한스 씨 이야기 읽기로 했었잖아!"

"한스 씨도 이렇게 볕 잘 드는 지붕에 올라오면 낮잠이 자고 싶을거야..."

"한스 씨는 고양이니까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넌 사람이잖아! 에데, 카를 좀 일으켜 세워봐!"

"카를~ 얼른 일어나! 일어나서 공부하자! 이번엔 나한테 이겨봐야지!"

에데는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와인 때문인지 발그레해진 카를 뺨을 손바닥으로 챡챡 쳤어요. 카를은 진짜로 잠든 건지 잠든 척 두 사람을 놀리는 건지, 냠냠 입맛만 다시고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지요. 카를의 능청스러운 얼굴에 에데의 눈빛에도 장난기가 돌았어요.

"좋아, 잠든 척이 얼마나 오래가나 보자구!"

에데는 살그머니 상체를 숙여 카를의 스웨터를 끌어올렸어요. 카를의 배 위로 드러난 연회색 셔츠에 에데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생각이 미치자, 로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데를 말리려 했어요. 

"에데 잠깐만, 여긴 지붕 위니까..."

"으핫, 아하하하하학!!"

"후회하기엔 늦었어, 어디 맛 좀 봐라!"

로자가 말릴 새도 없이 에데는 카를의 배를 무자비하게 간지럼 태웠어요. 예상치 못한 공격에 카를은 자지러지게 웃으며 긴 팔다리를 휘저었지요. 에데는 카를의 발차기를 피하려다 그만 중심을 잃고 기우뚱 흔들렸어요.

"어, 어어어!"

"에데!"

카를이 다급하게 팔을 뻗었지만 에데의 몸이 굴러떨어지는게 빨랐어요.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비명소리와 함께 자기 눈을 가리는 로자의 하얀 손이 눈꺼풀 뒤로 사라지자마자 에데는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걸 느꼈어요. 귓속이 물이 들어찬 것처럼 멍해지고,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는 천천히 눈을 떴어요. 

"헉, 후우, 하아..."

멍해진 귀에 소리가 다시 돌아오자마자 금방이라도 숨 넘어갈 듯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어요. 다리가 의지할 데 없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는 걸 인식하자, 본능적으로 비어있는 손이 쇠창살을 움켜쥐었어요.

"허억, 뭐, 해, 멍청아...! 얼른 딛고, 올라서지, 않고....!"

에데는 허겁지겁 다리를 발코니 바닥으로 끌어올렸어요.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발코니 창살에 가슴을 걸치는 데 성공하자, 손을 잡아준 사람이 에데의 멜빵을 잡고 상체를 창살 안으로 잡아당겼어요. 간신히 발코니로 올라온 에데가 다리가 떨려 그 자리에 무릎을 꿇자, 그 사람도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어요. 에데는 아직도 그 사람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땀범벅이 된 손을 화들짝 놓았어요.

"가, 감사합니다..."

에데가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지만, 그 사람은 숨만 쉬기에도 벅찬지 센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도 하지 않았어요. 대신에 지붕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카를만이 어쩔 줄 몰라하며 중얼거렸지요.

"카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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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r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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