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6

본편로그(앞부분) 2015. 2. 11. 02:58

"그 애는 다시 안 올거야, 에데."

<첫 번째 숙제>




 

에데는 책을 가볍게 넘겨보며 복도를 걸었어요. 특별히 갈 곳이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저 걸으면서 책을 읽는게 편했을 뿐이에요. 은행에서 가만히 앉아 몇 시간이고 숫자랑 씨름하던 에데에겐 가벼운 산책이 사색하기에 딱 좋은 취미였거든요. 에데는 발걸음에 맞추어 생각했어요. 돈이 없는 사람은 불쌍하고, 돈이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는 게 당연한 일 같은데. 크리스마스면 은행 앞에 놓인 구세군 냄비에 돈이나 옷꾸러미를 넣던, 모피 코트를 입은 아가씨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갔어요. 로자는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걸까요? 

그 때였어요.

쨍그랑!

집 밖에서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에데는 반사적으로 창가로 달려갔어요. 밖을 내다보자, 사방에 하얀 액체가 튀어있는 가운데 한 아이가 서 있는 것이 보였어요. 아무래도 우유병을 깨뜨린 것 같았지요. 에데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대문을 열었어요.

"아..."

아이는 에데를 보자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푹 숙였어요. 떨어진 우유병 때문에 무릎까지 우유로 흠뻑 젖어있는 꼴이 안쓰러워 보여서, 에데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물어봤어요. 

"이 집에 배달하려던 우유니?"

"네, 맞아요."

망연자실해 있던 아이는 에데의 말에 반짝 정신을 차린 듯, 우유 웅덩이 속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주워모으기 시작했어요.

"우유는 내일 다시 배달해드릴게요. 죄송해요."

대금은 제가 치를 테니까... 아이는 힘 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다시 유리조각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어요. 에데는 급히 아이를 말렸어요.

"깨진 유리는 위험해! 내가 치울테니 잠깐 앉아있어. 많이 힘들어 보이네."

정말이지, 아이의 초췌하게 패인 눈이나 말라붙은 입술은 보는 쪽이 다 힘이 빠질 만큼 처량해 보였어요. 어디 사는 아이인지는 모르지만, 숲속에서 마차를 타고 한참이나 달려야 나오는 이 집까지 무거운 우유병을 들고 오느라 고생했을 모습이 눈에 선했죠. 

"괜찮아요, 시간이 많이 늦어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이는 바구니가 달린 묵직해 보이는 통까지 등에 지고 있었어요. 이 집 말고도 들러야 할 집이 많아보였지요. 에데는 문득, 이렇게 우유를 잔뜩 짊어지고 아침부터 배달을 다녀야 하는 아이한테 쏟아버린 우유 값을 치를 돈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금만 기다려."


----------------------------------------------------------------------------------------


에데가 서재를 나간 다음, 카를은 한참을 책을 붙잡고 씨름을 했어요. 돈이 없는 사람들이 불쌍한 건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돈이 많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일까요? 그럼 이 집의 주인인 프레드 씨부터 나쁜 사람이 될 게 틀림없지요. 설령 돈을 많이 갖고 있는게 나쁜 일이라곤 해도, 그렇다면 어쩌라는 말인가요? 돈 많은 사람들한테서 돈을 뺏어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기라도 하란 말인가요?

"아, 이거 교회에서 하는 일이잖아?"

하지만 그건 교회니까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가난한 사람이 자기한테 돈이 없다고 돈 많은 사람들한테서 돈을 뺏는다면 그건 강도질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프레드 씨의 책에 교회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어요. 로자한테 말했던 것처럼, 프레드 씨가 직접 부자들의 멱살을 잡아줄 것 같은 느낌만 들었지요. 프레드 씨는 옛날 이야기 속의 로빈이라도 될 셈인 걸까요?

끙끙대던 카를은 문득 로자의 숙제를 전혀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를이 로자한테 했던 말은, 자기한테 떠오른 생각을 솔직하고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었지요. 지금 카를이 하고 있는 생각도 평소 카를의 상식과 어긋나지 않는, 솔직한 카를의 생각이었어요. 

'진실도 처음에는 상식의 껍질 밑에 숨어있는 법이지'

로자의 말이 떠올랐어요. 카를의 상식에 기반을 둔 생각은 새로울 게 없는 생각이지요. 방을 나가던 에데의 뒷모습도 떠올랐어요. 새로운 생각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지요. 함께 이야기를 나눌 다른 사람도 없는 이 방에서라면, 더더욱 밖으로 나가야 했어요. 진작 에데처럼 할걸. 카를은 살짝 후회하며 방문을 열었어요.

"...넌 누구지?"

문 밖에는 뜻밖에도 사람이 서 있었어요. 구레나룻과 목덜미 쪽이 약간 거뭇한 것 빼곤 온통 새하얀 머리카락은 중구난방하게 뻗쳐 있었고, 새카만 눈썹과 사정없이 쏘아보는 눈빛이 무시무시해서 카를은 등골이 서늘했어요. 이 남자는 카를을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카를은 직감적으로 눈앞의 이 사람이 집주인 카를 씨라는 걸 알 수 있었죠.

"오, 오늘부터 이 집에서 후원받게 된 카를...입니다."

카를 씨는 짙은 눈썹을 의미심장하게 찌푸렸어요. 얹혀사는 쪽의 카를은 슬쩍 눈을 들다가 자기를 훑어보는 듯한 집주인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어요.

"흠, 민나의 아들이군."

"어머니를 아시나요?!"

"자넨 모친이랑 좀 닮았나?"

카를은 혼란에 빠졌어요. 정체 모를 후원자가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는 사이였다는 것도 너무나 뜻밖인데, 갑자기 이런 영문 모를 질문을 하다니요. 닮았냐는 건 또 무슨 소리일까요? 얼굴 얘기일까요?

"그런...것 같지는...않은데요."

카를 씨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어요.

"자네 모친께 좋은 일이네. 여기서 할 일이 끝났다면 나가주겠나? 서재에 책을 찾으러 온 거라서 말이야."

카를 씨는 복도 쪽으로 정중하게 팔을 뻗었어요. 원래도 나가려던 참이었지만 어쩐지 얼떨결에 쫓겨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카를은 로자의 숙제도 잊어버리고 닫힌 서재 문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어요.


----------------------------------------------------------------------------------------


"미안해, 오래 걸렸...어라?"

에데는 한 손에 우유가 든 컵, 다른 손에 몇 닢의 돈을 들고 대문을 열었어요. 하지만 우유가 스며들어 검게 젖은 땅과, 미처 줍지 못한 듯 곳곳에 박혀 반짝이는 작은 유리조각을 빼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우유 값을 내 주려고 했는데, 아이는 바쁘다더니 금방 떠나버린 모양이었어요.

"이거라도 마시고 가면 좋았을텐데..."

도시의 기숙사에서였다면 금방 찾았을텐데, 어제 막 도착한 집의 부엌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마침 어느 방의 침구를 정리하고 있던 렌헨을 찾아내 우유 한 잔 따라달라고 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말았죠. 내일이면 그 아이가 다시 우유 배달을 올테니까, 그때라도 줘야겠다. 에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들고 있던 우유를 마셨어요.

"그 애는 다시 안 올 거야, 에데."

맛나게 우유를 마시던 에데는 깜짝 놀라 돌아봤어요. 어느 새 로자가 나타나 대문에 기대어 서 있었어요.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아니, 그보다...안 온다는 게 무슨 소리야."

"그앤 지난번에도 한 번 우유병을 깼었거든. 주인이 한번은 봐 줘도 두 번이나 손핼 보려고 하진 않겠지."

"우유 값만 메꾸면 될 거 아냐!"

"너 같으면 같은 값에 병도 안 깨뜨리고 발도 날랜 건강한 아일 고용하겠니? 아니면 우유 배달 아니면 할수 있는 일도 변변히 없을 것 같은 그 애를 계속 두고 쓰면서 손해를 감수하겠니?"

로자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어요. 에데는 절망적으로 손바닥 위의 동전을 내려다봤어요.

"우유 배달 일당이 얼마나 한다고..."

"소를 키우는 목장 주인도, 우유를 가공하는 공장 주인도 부자는 아니야. 다른 목장과, 다른 공장과 경쟁해서 살아남으려면 조금의 비용이라도 아껴야 하지."

"하지만...그건 너무..."

"나쁜 짓인 것 같아? 부자들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내가 그렇게 말했지."

"너한테 평범한 사람들에게 평범함 이상의 자비심을 강요할 권리가 있니? 너 하나의 호소로 그것을 이끌어낼 능력이 있니?"

"아니."

"그래서 네 말은 틀렸다는 거야, 에데."

두 사람은 가만히 우유병이 흩어진 땅바닥과, 작은 일꾼이 우유를 짊어지고 사라졌을 숲속을 바라보았어요. 로자의 단어는 차가웠어요. 하지만 에데는 로자의 말에 마음 상하지는 않았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따뜻하고, 그리고 지금의 에데의 마음처럼, 슬펐기 때문이에요.



  

 

'본편로그(앞부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편 8  (0) 2015.03.21
본편 7  (0) 2015.03.03
본편 5  (0) 2015.01.04
본편 4  (0) 2014.12.03
본편 3  (0) 2014.10.15
Posted by Orian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