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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00

본편로그(앞부분) 2018. 2. 28. 14:14



본편로그(앞부분) 폴더에 있던 컷로그들의 리터칭...은씨바 그냥 처음부터 다시그리기와

글로그 부분의 컷로그화 작업이...순차적으로...있겠습니다...더 이상 미룰 수 없음...

본편로그(앞부분)폴더의 글들은 비공개화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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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12

본편로그(앞부분) 2015. 7. 12. 16:45





"이 동화로는 거기까지 설명 못 해요."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




카를은 로자와 카를 씨의 설명을 듣고 나자 살짝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어차피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거면 처음부터 전제를 그렇게 할 것이지, 실컷 머리 쓰게 해놓고서 그렇게 일축하다니 허탈하게 말이에요. 카를이 비록 "영혼은 중요하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살아있을 수 없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회에서 통용되는 영혼의 의미에 맞추어서 대답했던 것 뿐이에요. 하지만 가만히 되짚어 보면 두 사람은 일관되게 비유의 영역에만 영혼이라는 표현을 한정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질문을 던진 카를의 수준에 맞추어서 설명을 해주려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설명을 계속하기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해둬야겠어. 자네들 혹시 영혼이 실존한다고 믿고 있지는 않겠지?"

"아뇨"

"아뇨."

"그렇다면 이야기가 쉬워지는군."

프레드가 지원자모집요강에서 종교여부를 묻는 걸 깜빡했다고 한 게 문득 기억나서 말야.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카를 씨는 어디까지 얘기했었냐고 로자에게 물어봤어요. 로자는 카를의 두 번째 질문에 답하던 참이라고 대답해 줬어요.

"두 번째 질문?"

"어째서 '일'이 영혼만큼 중요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요."

"아, 그래. 거기까지 왔었지. 자네들도 아마 동의하겠지만, 영혼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니 카를의 질문에서도 영혼이라는 표현은 빼도록 하겠네. 어째서 '일'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걸 설명해 주면 되겠어. 그건 그렇고 로자, 두 번째 질문이라고 했는데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선 대답했었던가?"

"아직요. 수업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졌을 뿐이에요. 첫 번째 질문은 '추상적인 개념인 일이 어떻게 물건에 담길 수 있는가'였어요. 이걸 먼저 설명하는 편이 수정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이해를 돕기에도 나을 것 같아요."

난 내가 무슨 질문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로자는 정말 똑똑하구나... 카를 씨의 질문에 꼭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척척 대답하는 로자의 모습에 카를은 감탄했어요. 그러고 보니 로자는 카를이나 에데에 비해 많이 어린데, 지금까지 한 번도 동생을 대한다는 느낌을 준 적이 없었지요.

"그래, 네 말대로 첫 번째 질문이 좀더 근본적인 질문이 되겠구나. 카를, 에두아르트. 일, 즉 노동이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노동이 물건에 담긴다는 개념에 대해 설명해 주겠네."

카를도 에데도, 이 부분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터라 카를 씨의 말에 자세를 고쳐 앉았어요.

"카를, 노동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냐는 자네의 표현은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정답에 대단히 가까웠어. 노동에는 구체적인 측면과 추상적인 측면이 모두 있지만, 우리가 여기서 문제로 삼는 것은 추상적인 노동이거든. 물론 자네가 생각했던 추상성과는 조금 의미가 다를 것 같지만 말이야."

이 시점에서 벌써 포기하고 싶어졌지만, 카를은 멀어지려는 의식을 다잡고 귀를 기울였어요.

"노동은 영혼과 달리 현실세계에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가 일꾼들이 일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도 있지. 하지만 일꾼들의 일이 끝나면 노동이 존재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네가 말한 뜻에서 추상적인 개념처럼 여겨지는 거라네. 하지만 정말로 노동의 흔적이 안 남았을까?"

"누군가가 사진으로 찍어놨다면 남았겠지요."

"그림으로 그려놔도...잠깐 에데, 그런 얘기가 아닌 것 같아."

카를이 무릎을 탁 치며 에데의 말꼬리를 끊고 끼어들었어요. 사실 진짜로 치지는 않았고, 마음속으로만 쳤지요.

"장난감! 장난감에 노동의 흔적이 남아있어요. 로자가 말했듯이..."

"그래, 맞아. 하지만 노동이 장난감, 즉 생산물에 미친 영향은 단순히 흔적을 남기는 수준의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네. 장난감의 원료인 주석은 노동에 의해 장난감의 형태가 되면서 본래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성질을 획득했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걸세. 그 성질은 가치라고 해. 카를과 에두아르트, 장난감의 가치가 뭐라고 생각하나?"

"장난감의 가격 말씀이신가요?"

"가지고 놀면 즐거움을 가져다 주지요."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대답하자, 카를 씨가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어요. 카를은 어느새 카를 씨의 웃는 표정이 비웃는 표정인지 아닌지 알아맞추는데 흥미를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어요.

"자네들은 두 사람이 합쳐져 한 사람 몫을 하는 모양이야! 그런 사람들을 몇몇 알고 있지. 에두아르트, 자네가 대답한 건 장난감의 사용가치일세. 장난감을 사용함으로써 사람이 실제로 얻을 수 있는 이익,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물건의 성질."

"그리고 카를이 대답한 건 장난감의 교환가치일세. 시장에서 장난감이 다른 물건과 교환될 때, 그 다른 물건의 양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 조금 더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설명한다면, 시장에 장난감을 내놨을 때 장난감에게 지불되는 화폐의 크기. 그것이 교환가치. 하지만 사실 이건 장난감의 진짜 가치가 아니지."

카를은 카를 씨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틀린 답을 말한 것 같다는 느낌은 확실히 들었어요. 이제 자기가 틀린 답을 말했다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문제는 왜 틀렸는지 이해하기조차 어렵다는 거였지요.

"음, 생각해 보니까 그렇군요. 장난감의 가격보다 그게 얼마나 유용한지가 더 중요하지요...그런데 사용가치가 뭔지는 알겠지만 교환가치의 설명이 잘..."

"너무 앞서 나가지 마, 카를."

카를 씨가 카를의 말을 끊었어요.

"자네 단계에서 인도자의 도움 없이 멋대로 달려나가다간 진창에 발이 빠져서 고꾸라지기 일쑤니까. 한스 씨의 고객에게는 장난감의 사용가치가 더 중요하더라도, 우리의 수업에 있어서는 교환가치 쪽이 훨씬 복잡하고 중요하다네."

"그, 그렇군요."

"교환가치에 대해 진짜 가치가 아니라고 한 말이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걸세. 그럴 만도 해. 교환가치는 진정한 가치의 표면을 장식하고 있거든. 그래서 진짜 가치와 교환가치를 혼동하거나 둘의 중요성을 잘못 판단한 학자들이 여럿 있었지."

시장통의 학자들 말이야...카를 씨가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어요. 아무래도 안 좋은 추억이 있는 모양이에요.

"카를, 잠깐만요."

카를과 에데의 표정을 살피던 로자가 말했어요.

"그것까지 설명하기 시작하면 힘에 부칠 거예요. <한스 씨 이야기>는 소외에 관한 텍스트라고요. 본격적으로 가치 이론에 대해 공부하게 되면 따로 정리할 시간을 가질 거니까, 지금은 개념이 아주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적당히 교환가치를 기준으로 설명하는 게 어때요?"    

로자의 말에 인상을 쓰고 있던 카를 씨가 고개를 들고 카를과 에데 쪽을 쳐다봤어요. 카를과 에데는 속으로 로자에게 환호성을 지르며 맞잡고 있던 손을 카를 씨에게 안 보이게 침대 밑으로 내렸어요. 

"하지만 카를이 노동이 어째서 중요한지 물어봤잖니. 이걸 제대로 대답해 주고, 노동에서 소외된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를 이해시키려면 노동과 가치의 정확한 정의부터 가르쳐야..."

"카를!"

로자가 단호하게 카를 씨의 말을 막았어요.

"카를은 하여간 뭐가 됐든 완벽하게 하지 않으면 성에 안 차는게 흠이에요. 하지만 지금 카를과 에데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강의가 아니라 쉬운 강의라고요! 카를은 이 두 사람을 전에도 가르쳐 본 적 있나요?"

"없지."

"적어도 전 하루는 가르쳐 봤어요. <한스 씨 이야기>를 어떻게 잘 활용해서 두 사람 수준에 맞게 소외 개념을 가르칠까 미리 계획을 짜놓은 것도 저라고요. 제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 수업권을 뺏어간 카를에게 수업시간 반환을 청구할 거예요!"

카를 씨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당돌하게 맞서는 로자의 모습에 카를은 깜짝 놀랐어요. 카를이 카를 씨와 로자의 수업을 듣고 두 사람만큼 아는 게 많고 똑똑해진다고 하더라도, 카를 씨에게 저렇게 두려움 없이 덤빌 수 있을까요? 아마 어려울 거예요. 침대 밑으로 내렸던 손이 꽉 쥐어지는게 느껴져서 슬쩍 곁눈질을 하자, 에데도 카를과 마찬가지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로자를 보고 있었어요. 아직 카를과 손을 맞잡은 채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것 같았지요.

카를 씨는 어떤가 봤더니, 뜻밖에도 평온한 표정이었어요.

"그래, 로자. 내가 깜빡했구나. 너라면 어떻게 설명하고 싶니?"

"사실 교환가치니 사용가치니 하는 용어를 꺼내는 것도 아직은 좀 이르다고 봐요. 카를과 두 사람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놔두기는 했지만요. 내가 첫날에 카를과 에데한테 앞으로 며칠간은 준비운동 단계라고 얘기했으니, 그 약속을 지켰으면 좋겠어요."

이런 일이 종종 있는 것일까요? 카를 씨가 카를이나 에데에 비해 로자에게 상냥한 건 척 보기에도 확연했지만,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학생이 이렇게 대드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담담한 선생님은 처음 봤어요. 로자가 대단해 보이는 만큼 카를 씨도 만만치 않구나. 카를은 그렇게 생각했지요.

"로자 말 들었지? 혼란스럽게 했다면 미안하군. 나는 어느 정도의 혼란함은 학생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거라고 보지만..."

"카를!"

"교환가치란 쉽게 말해 장난감이 시장에서 팔리면 사회적으로 합의된 만큼의 값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라네. 한스 씨가 푸줏간에서 고기를 사고 청과상에서 채소를 살 수 있는 건 장난감의 교환가치대로 받은 대금이 있기 때문이지. 화폐가 없던 옛날이라면 장난감을 굳이 돈으로 바꾸지 않고 동일한 교환가치를 가진 고기나 채소와 바로 맞바꾸었겠지만 말이야."

카를 씨는 로자가 닦달하자 살짝 급한 말투로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이 교환가치가 반드시 한스 씨가 살아가는데 충분할 만큼의 비율로 정해지는 것도 아니라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고...지금 하면 안 되겠지?"

"순서를 한참이나 건너뛰는 일이에요, 카를. 그리고 이 동화로는 거기까지 설명 못 한다고요."

"아, 아무튼 한스 씨는 장난감을 팔아야만 돈을 받고, 그래야만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어. 그런데 자기가 힘들여 만든 장난감의 가격조차 제 마음대로 못 정하고, 늘 집세나 외상값 걱정을 해야 한다네. 장난감을 악마에게 팔고 받는 값이 부족하다 보니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이 장난감을 만들고, 최대한 오랫동안 일하려고 하는 바람에 늘 피곤하고 일이 재미가 없어. 슬프게도 우리 사회의 인간은 한스 씨와 같은 처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네. 특히 밑천이라고는 오직 자기 자신의 노동력밖에 갖지 못한 사람들은 말이야."

"물주가 아닌 일꾼들 말이로군요."

에데의 추임새에 카를은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말 같다고 생각했어요. 곧 로자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 대신에 쓰자고 했었던 말이라는 게 기억났지요. 

"공부를 아예 안 하진 않았군그래. 맞아, 일꾼들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사용가치를 가진 물건을 만들어내면서도 그것들을 제 것으로 삼지 못하는 이들이지. 한스 씨는 그래도 제 가게가 있지만, 맨 처음에 그 가게를 내준 게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결국 악마한테 일꾼으로 고용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야. 가게를 스스로 운영할 때는 괜찮았지만, 악마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나서는 장난감을 마음대로 팔지도 못하고, 일을 즐기지도 못하고, 동네 어린이들과 이야기하거나 놀지도 못하게 되었지. 푸줏간이나 청과상, 빵가게 주인과도 늘 싸우게 되고 말이야."

로자에게 옆구리를 몇 번 찔리고 나자 카를 씨의 설명이 아주 이해하기 쉬워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에데는 여전히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게 있었어요.

"첫 수업에서 물주와 일꾼이 얼만큼 돈을 나눠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카를은 물주들은 밑천을 낸 만큼 가지고 일꾼들은 일한 만큼 가져야 된다고 했고, 로자는 그 기준을 누가 정하는 거냐고 물어봤고요. 우리 모두 일꾼들이 정하는 건 아니라는 데 동의했어요. 이것이 카를 씨가 말하는 '일을 빼앗기는 것'인가요?"

"그래, '소외'라네."

"그러면 일꾼들한테 일한 만큼의 돈을 주지 않도록 정한 건 누구인가요? 물주들인가요?"

"최종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물주들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들 역시 일꾼들의 몫을 정할 때 따르는 기준이 있다네."

"그 기준은 누가 정하나요?"

"그걸 설명하려면 로자가 말하는 '다음 시간'이 되어야 할 것 같군. 오늘 수업은 길게 하려면 얼마든지 길게 할 수 있지만, 로자가 원하는 대로 간단하게 하려면 이야기해야 할 개념은 이미 다 나왔어.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생산물로부터, 그리고 다른 인간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는 그런 인간 소외의 과정을 묘사한 동화라네. 이야기를 들을 당시에는 놓친 부분이 있어도, 책을 읽으며 복습하면 소외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걸세."

"카를 씨, 저..."

수업은 마무리되어가는 분위기였고, 에데도 로자도 카를 씨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카를은 이걸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노동에서 소외된 일꾼의 생활이 아주 괴로워진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여전히 살아갈 순 있잖아요. 반대로, 노동을 하지 않고도 잘 사는 물주와 물주의 가족들도 잘만 살아가고요. 카를 씨가 제 질문에서 영혼을 빼내 버렸지만, 제가 진짜로 궁금했던 건 노동이 영혼만큼, 그러니까 노동이 없으면 어떤 사람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결정적으로 중요하냐는 것이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선, 조금 어려워도 되니까, 지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어려울 게 뭐 있나, 카를."

카를 씨는 차분히 대답했어요.

"인간은 동물처럼 자연에 의해 제약을 받지만, 동물과 달리 노동을 통해 자연을 인간의 욕망에 봉사할 수 있도록 변형시켜 물건을 생산하는 유일한 생물이라네. 사회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사용할 물건을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만들 필요가 없어졌을 뿐이지. 노동하지 않는 물주들이 가지고 있는 밑천도, 그들이 일상에서 소비하는 모든 물건도, 자연에서 그 모습 그대로 튀어나온 게 아니라 과거에 어떤 일꾼이 만들어낸 것이라네. 분업과 교환이라는 인간사회의 시스템 덕분에, 아니 사회 그 자체 덕분에 그것들은 일꾼의 손으로부터 물주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던 거지. 이 모든 노동의 산물들을 제거해 버리면, 물주든 일꾼이든 계속 살아있을 수 있겠나? 물주들이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굶어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일꾼들은 왕왕 그나마 가진 재산조차 팔지 못해 굶어죽는다는 현실적인 차이를 제외하고 이론상으로만 말하자면, 어떤 인간이건 노동 없이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네."

듣고 나니 참 당연하게 느껴지는 설명이었어요. 이렇게 당연한 걸 재차 설명하는게 귀찮을 법도 했지만, 카를 씨는 의외로 면박을 주거나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짓지도 않고 진지하게 설명해 주었어요. 로자가 두 사람의 수준에 맞춰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일까요? 어쨌든 덕분에 카를은 적어도 핵심적인 부분은 놓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카를이 카를 씨의 설명을 곰곰히 곱씹으며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을 때, 에데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어요.

"그러고 보니 악마와 만나기 전의 한스 씨는 어떻게 노동 없이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걸까요?"

"에두아르트, 지금까지 뭘 듣고 있었던 거야! 자네까지 이러긴가?"

카를 씨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쏘아붙였어요. 아무래도 지금까지 참고 있던 답답함이 폭발한 모양이에요.

"빌어먹을 한스 씨는 그 악마새끼를 만나기 전엔 사람도 아니었단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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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빼앗기는 것"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




 

카를 씨는 이야기를 마치자 조용히 카를과 에데 쪽을 쳐다보았어요. 질문을 재촉하는 눈빛이었지요. 카를 씨의 말없는 채근에 에데는 뭐라도 질문을 해야겠다 싶어서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에데가 말문을 열기 전에 카를이 선수를 쳤지요.

"저...그래서 한스 씨는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카를 씨는 눈을 깜빡였어요. 카를의 질문이 뜻밖이었던 모양이에요.

"그게...궁금한가?"

카를 씨의 반문에 카를은 질문이 이상했나 싶어서 슬쩍 에데와 로자 쪽을 돌아봤어요. 솔직히 학문적인 질문은 아니라는 건 카를도 인정해요. 하지만 "그래서 오래도록 이러저러하게 살았답니다"는 식으로 끝나는 옛날이야기의 주인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건 인지상정이잖아요. 안 그래도 카를 씨에 대해 가졌던 무서운 인상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던 터라, 카를은 망설임 없이 "네"라고 대답했어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일하다가...영혼을 빼앗겼나요?"

푸흡, 하고 웃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어요. 로자였지요.

"미, 미안. 너무 예상 외의 질문이라 그만..."

"로자, 학생의 질문을 비웃어선 안 돼."

카를 씨는 웃음을 억누르느라 헛기침을 하는 로자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어요. 감싸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굳이 내 질문이 비웃음거리라는 걸 못박아주지는 않으셔도 되는데, 라고 카를은 생각했어요.

"특히 그 학생이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학생이라면 말이야."

"비웃은 거 아니에요, 카를! 그냥 천진난만한 질문이라 웃음이 나온 거라구요."

진짜 아닌 거 알지? 로자는 미안함의 표시로 카를의 팔을 톡톡 두드렸지만, 표정은 그닥 미안해 보이지 않았어요. 카를 씨도 로자한테 충고하긴 했지만, 웃음을 띄우고 있는 걸로 봐서 내심으로는 로자에게 동조하는 것 같았어요.

"흠, 덩치에 안 어울리게 순진한 소년이 자네 안엔 들어있는 모양이야. 어쨌건 첫 번째 질문을 던진 용기는 평가하겠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답은 '그렇다' 야."

"뭐라고요?"

로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를 씨에게 시선을 보냈어요. 꼭 '나한테는 그런 얘기 하지 않았잖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요.

"하지만 동시에 '아니다'이기도 하지."

카를 씨는 당혹해하는 로자의 시선을 받아치며 말했어요.

"로자, 너는 그동안 수업을 잘 들어왔으니까 한스 씨가 영혼을 빼앗기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면 이번에는 한스 씨가 영혼을 빼앗겼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렴."

로자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곧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어요. 

"잠깐, 로자. 후배들의 생각을 먼저 들어봐야지. 카를, 왜 한스가 영혼을 빼앗겼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냥 로자가 대답하게 두었으면 좋았을텐데. 카를은 난처해졌어요. 왜라니, 달리 이유가 있나요. 옛날 이야기에서 악마랑 계약을 하는 인물들은 보통 영혼을 뺏겨서 영원히 지옥에서 괴로워하거나 기지를 발휘해 영혼을 지켜내고 악마를 퇴치하거나 둘 중 하나로 끝나니까 그렇게 말했을 뿐인걸요.

"어...그냥 예시를 들었을 뿐이에요. 흔한 결말이잖아요."

카를 씨의 마뜩찮아하는 표정을 보고서야 카를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번에도 상식에 갇힌 대답을 해버렸지 뭐예요. 카를 씨는 차분하지만 묘하게 성마른 어조로 카를에게 말했어요.

"내 이야기에 나오는 악마는 분명 영혼은 필요없다고 말했었지. 악마는 함정을 팔지언정 거짓말을 하지는 않아. 반드시 약속을 지키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라네. 옛이야기에 나오는 악마들은 어떤 형태로든 제 입으로 계약자의 영혼을 가져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영혼을 가져갈 수 있는 걸세. 악마가 한스의 영혼이 필요없다고 한 이상 한스가 영혼을 빼앗기는 결말은 있을 수 없네."

"저, 그러면 카를 씨." 카를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카를 씨의 말을 끊었어요. 

"그럼 아까 한스가 영혼을 빼앗겼다고 말씀하신 건 왜...?"

"내가 자네한테 물어본 게 그것 아닌가? 나한테 되물어봐서 어쩌려고?"

카를 씨의 일갈에 카를이 어쩔 줄 몰라하자, 에데가 급하게 끼어들었어요. 

"비유적인 표현 아니었을까요? 카를 씨가 한스의 영혼이 빼앗겼다고 한 건 말이에요."

찡그린 표정으로 카를을 보고 있던 카를 씨가 에데 쪽으로 눈길을 돌렸어요. 에데는 최대한 태연한 태도로 보이도록 꼿꼿하게 카를 씨를 마주봤어요.

"악마가 실제로 한스의 영혼을 가져가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카를 씨 말씀대로 한스의 영혼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미리 말했으니까요. 하지만 한스에게는 그 대신에 영혼을 빼앗기는 거나 마찬가지인 일이 생긴 거예요. 카를 씨는 그걸 '영혼을 빼앗겼다'고 표현한 거죠."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나?"

"그건..."

에데는 원래 하려고 했던 질문을 떠올렸어요. '한스 씨를 구할 방법이 없을까요?'라는 질문이었지요. 

"한스 씨는 계속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누가 구해주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요."

어제 로자와 우유 배달부 소년에 대해 했던 이야기, 일꾼들의 삶에 대한 프레드 씨의 책, 모든 것은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에데는 <한스 씨 이야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카를 씨가 듣고 싶은 이야기의 윤곽을 흐릿하게나마 알 것 같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한스 씨가 죽은 게 '영혼을 빼앗긴 일'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그러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가 되니까요. 죽음은 아니면서, 영혼을 빼앗기는 것처럼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일...한스 씨가 힘들여 만든 장난감들을 악마에게 계속 빼앗긴 걸 말씀하신 건가요?" 

에데는 말을 마치고 카를 씨의 대답을 기다렸어요. 카를 씨의 표정은 무덤덤했어요. 여전히 찌푸리고 있는 눈썹을 보면, 에데가 나름 자신있게 했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까요? 카를 씨는 흠, 하고 작게 콧소리를 냈어요.

"반은 맞췄군. 좋아하지는 마, 내 얘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그 정도도 추론하지 못하는 멍청이를 이 집에 둘 수는 없으니까."

카를은 가라앉은 기분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애썼어요. 카를 씨의 진심이 어떨지는 몰라도, 방금 카를 씨의 말대로라면 카를은 이 집에서 쫓겨나야만 해요. 

'로자는 이 수업이 생각하는 연습을 하기 위해 쉬운 책을 읽는 수업이라고 했는데, 첫 단계에서 벌써 이렇게 헤매는 걸 보면 난 카를 씨가 가르치려는 과목이 적성에 안 맞는 걸지도 몰라.' 

카를의 걱정스러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를 씨는 무심하게 대답을 재촉했어요.

"카를, 에두아르트의 대답을 보충할 수 있겠나?"

"...아니오, 잘 모르겠어요."

카를은 에데가 대답할 때까지 카를 씨의 말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에데도 찾지 못한 답을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요? 카를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카를 씨는 들릴락 말락하게 혀를 차고는 로자에게 차례를 넘겼어요. 로자는 카를에게 살짝 동정적인 눈빛을 보내고는 또박또박 대답했어요.

"카를이 한스 씨의 영혼에 대해 이야기해서 처음엔 깜짝 놀랐어요. 우린 영혼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한 적 없었고, 할 예정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비유적인 표현이라면 납득이 가요."

로자는 거기서 말을 끊고 카를과 에데 쪽으로 몸을 틀었어요.

"카를, 에데. 한스 씨가 악마를 위해 일하느라 영혼을 빼앗겼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 하나는 에데가 설명한 것처럼 열심히 만든 장난감들을 빼앗겨 버린 것. 우리는 흔히 열심히 만든 물건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고들 하지? 한스 씨가 만든 장난감에는 한스 씨의 영혼처럼 소중한 게 담겨 있는데, 그런 소중한 장난감들을 더 이상 마음대로 팔거나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어. 그 장난감들은 악마가 가져가 버렸지. 그게 첫 번째 의미야."

"한스 씨의 장난감에 담겨 있는 소중한 게 뭐야? 진짜 영혼은 맥락상 아닌 것 같은데."

"한스 씨의 일 그 자체야."

로자의 대답에 질문한 에데도,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를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어요. 한스 씨의 일이 담겨 있다는게 무슨 말일까요? 

"일이 담겨 있다는게...무슨 뜻이야? 이것도 비유적인 표현이니?"

"아니, 이건 말 그대로의 의미야. 한스 씨가 일을 함으로써 장난감이 만들어졌어. 한스 씨의 노력과 시간이 없었으면 장난감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지. 장난감에 일이 담겨있다는 말이 이해가 잘 가지 않니? 그러면 장난감이 한스 씨의 일 그 자체라고 생각하면 돼. 장난감, 예를 들어 놋쇠 병정이라고 치면, 병정을 만들기 위한 재료인 놋쇠, 그리고 놋쇠를 다듬기 위한 한스 씨의 공구를 제외하고는 놋쇠 병정은 한스 씨의 일로 이루어져 있는 거야. 엄밀히 말하자면 한스 씨가 만들지 않은 놋쇠와 공구도 원래는 다른 일꾼들의 일 그 자체였지만 말이야."

로자가 기껏 차근차근 설명해 줬는데도 두 사람은 더욱 헷갈리기만 했어요. 차라리 장난감에 영혼이 담겨있다는 말이 이해가 갔으면 갔지, 장난감을 만들기 위한 사람의 "일"이 그대로 장난감이 된다는 게 어떻게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표현이 될 수 있을까요? 카를 씨의 질문도 알쏭달쏭했지만 로자의 설명은 더욱 수수께끼 같았어요. 에데는 혹시 이해했을까? 카를은 슬쩍 에데 쪽을 보았지만, 에데도 혼란스러워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아 용기를 내서 카를 씨에게 물어봤어요.

"한스 씨의 일도 영혼처럼 추상적인 개념 같은데, 어떻게 영혼과 달리 장난감에 '진짜로' 담길 수 있는 건가요? 그리고 만약 담겨있다손 쳐도, 그 일이 영혼만큼 중요한 것인가요?"

카를 씨가 빙긋 웃었어요. 비웃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대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질문을 했군, 카를. 오늘 자네가 한 말들 중에서 가장 괜찮았어. 영혼의 문제는 좀 나중에 설명할 예정이었으니, 자네 질문에 대해서는 로자의 설명이 끝난 다음에 대답하도록 하지."

카를 씨의 말에 로자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 카를 씨는 너희가 어떤 점을 어려워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영혼을 빼앗겼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에 대해 듣고 나면 좀더 이해가 쉬워질 거야. 첫 번째 의미는 한스 씨가 일해서 만든 장난감, 즉 일 자체를 빼앗겼다는 뜻이라고 했지? 두 번째 의미는 좀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간단히 말하면 더 이상 일을 즐길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뜻이야."

에데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로자 말대로 두 번째 의미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지요. 어째서 그것이 "영혼을 빼앗긴다"는 표현으로 비유될 수 있는지는 아리까리했지만요.

"한스 씨가 지옥에 장난감들을 납품하느라 장난감 만드는 일이 고통스러워지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든 결과물인 장난감을 빼앗겨 버렸다...그것이 '영혼을 빼앗기는 것'의 의미. 어째서 그런 비유가 가능한가요? 카를도 똑같이 질문했지만, 일이 영혼만큼 중요하다는 이유를 잘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럼 반대로, 영혼이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뭐야?"

로자의 질문에 에데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어요. 영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왠지 아주 중요하다는 느낌이 드는걸요. 영혼의 양식, 영혼의 동반자, 영혼의 아름다움...무엇이든 영혼과 관련되면 더 고귀하고 중요하게 여겨지고, 반대로 일과 관련되어 있는 말들이 주는 인상은 일상적이고 시시하지요. 

"음...일을 안 하고도 잘 사는 사람들은 많지만,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살아있을 수 없잖아?"

카를이 에데 대신 대답했어요. 로자는 씩 웃었어요.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왔지. 사람이 사람에 대해 제대로 모르던 시절, 보이지 않는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설명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영혼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어. 몸이라는 그릇 안에 담긴 영혼이 생각하고, 느끼고, 몸을 조종한다고 생각했던 거야. 몸은 그릇일 뿐이고, 영혼이 사람의 본질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영혼이라는 낱말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본질이라는 의미를 부여했어. 그래서 옛이야기의 악마들은 호시탐탐 인간의 영혼을 노리고, 카를도 아주 소중한 것을 뺏긴 한스 씨에게 '영혼을 빼앗겼다'는 비유를 쓸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영혼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빼앗길 수도 없고, 소중하지도 않지."

카를 씨가 로자의 말을 받아 이었어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그것은 영혼이 아니라 노동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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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10

본편로그(앞부분) 2015. 6. 10. 02:42




"한스, 뭐 좋은 장난감 좀 만들어줄 수 없어?"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




 

어느 마을에 한스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살고 있었어. 한스는 장난감을 만드는 장인이었는데, 마법을 쓸 줄 알았기 때문에 언제나 새롭고 신기한 장난감을 만들어내곤 했지. 한스가 만드는 "한스 씨의 놀라운 장난감"들은 마을 어린이들이 꼭 하나씩은 가지고 싶어 안달하는 것들이었단다.

하지만 한스는 행복한 고양이는 아니었어. 그는 사실 악마랑 거래한 고양이였거든. 한스는 똑바로 서서 하늘을 보며 걸어다닐 수도 있고, 손으로 여러가지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인간들이 너무 부러웠어. 그래서 악마랑 거래를 한 거란다. 악마는 달콤한 목소리로 한스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말했어. 뒷다리로 서서 걸어다니는 능력, 원하는 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섬세한 앞발과 마법 솜씨, 마이스터라는 칭호와 장난감을 만들 수 있는 공방이 딸린 번듯한 장난감 가게까지. 너무나 좋은 조건에 한스는 대가로 뭘 줘야 하는 걸까 하고 두려워졌어. 

"악마는 계약의 대가로 영혼을 빼앗아간다던데, 너도 내 영혼이 가지고 싶니?" 

한스가 조심스럽게 묻자, 악마는 깔깔 웃으면서 되물었어. 

"고양이는 영혼이 아홉 개라고 하던데, 하나쯤 나한테 줘도 괜찮지 않을까?"  

한스가 겁에 질려서 수염을 빳빳하게 세우자, 악마는 농담이라고 하면서 진짜 조건을 말했어.

" 한스야, 네가 사람처럼 물건을 만들 수 있게 되는게 누구 덕분이지?" 

한스가 대답했어. "그야 네 덕분이지." 

"그래! 그러니까 네가 만드는 물건들 중 몇 개는 내가 가져도 되겠지? 난 네가 나한테 필요한 장난감들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 

뭐야, 알고 보니 정말 시시한 대가잖아? 이제 악마가 준 능력으로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게 될텐데, 그 중 몇 개를 주는게 뭐 대단한 일이겠어. 한스는 악마에게 조건을 수락하겠다고 했고, 곧 두 다리로 서서 걸어다닐 수 있는 특별한 고양이가 되었단다. 꿈으로만 그리던 장난감들을 만들어내면서 한스는 한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고양이로 살았어.

그러던 어느날, 악마가 한스를 찾아왔어. 꼬마 아가씨에게 3시가 되면 티타임을 갖는 태엽인형을 만들어주던 한스는, 자기에게 새 삶을 준 악마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 반갑게 맞으러 나갔지. 악마도 반가운 표정으로 한스에게 말했어. 

"오랜만이야, 한스! 네 장난감 소식은 지옥에도 들려오더라. 우리 아들도 하나 가지고 싶어하던데!" 

한스는 의기양양하게 말했지. "그럼! 내 장난감은 최고야. 아들이 뭘 갖고 싶어해? 말하는 대로 만들어 줄게." 

악마는 기뻐하면서 말했어. "병정놀이 세트를 만들 수 있어? 기왕이면 계급장이 진짜처럼 멋있었으면 좋겠어. 아들이 아주 좋아할 거야!"

 한스는 정성을 들여서 장난감 병정을 한 소대나 만들어 줬어. 놋쇠로 만든 계급장이 번쩍번쩍 빛날 뿐 아니라, 소대 열중 쉬어! 하고 명령을 하면 진짜로 척척 움직이며 쉴 정도로 정교한 병정들이었지. 악마가 고맙다고 하면서 장난감 소대가 든 상자를 짊어지고 떠나는 걸 한스는 뿌듯한 얼굴로 바라봤어. 장난감을 너무 오랫동안 만드느라 앞다리도 아프고 재료비도 많이 깨졌지만, 한스는 악마에게 좋은 선물을 해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어.

악마는 몇 달 후에 또 한스를 찾아왔어. 악마가 약간 슬퍼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마음씨 착한 한스는 신경이 쓰였단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말도 마, 한스." 악마는 한숨을 내쉬었어. 

"네가 지난번에 만들어 준 병정 장난감 있지? 우리 아들이 정말 좋아해서 밤에도 끌어안고 잘 정도인데, 친구들한테 자랑한답시고 보여줬더니 너도나도 빌려간다고 한두 개씩 가져가고는 오리발을 내밀더래. 벌써 두 분대나 없어져 버렸어." 

한스는 자기 일처럼 화를 냈어. "못된 놈들! 지옥에나 갈 놈들!" 

한스는 풀죽은 악마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는, 공방에 틀어박혀 장난감을 만들기 시작했어. 공방에서 나온 한스의 팔에는 어린이 키만한 크기의 진짜같은 악마 인형이 세 개 안겨 있었어.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 인형들이야. 지난번에 준 병정들보다 훨씬 똑똑하고 말도 잘 듣지!" 한스는 인형들을 악마에게 안겨주면서 말했어. 

"이 인형들이 네 아들의 충실한 부하가 되어줄 거야." 

악마는 너밖에 없다고 한스를 치켜세우며 인형들을 업고 지옥으로 돌아갔어. 한스는 예상외의 지출 때문에 사흘 내리 푸줏간 주인에게서 외상으로 고기를 사야 했지만, 왕처럼 떠받들어 주는 인형 친구들 덕분에 아들이 기운을 차렸다는 악마의 편지를 읽고 마음을 달랬어. 

악마는 몇 주 후에 또 한스를 찾아왔어. 악마는 아들이 요즘 솔로몬 놀이에 맛을 들인 것 같다고 말했지. 

"솔로몬 놀이가 뭐야?" 한스가 물어봤어. 

"지옥 어린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야. 예쁜 장난감을 가져와서 친구 한 명한테 주는데, 가지고 싶은 아이들이 많이 있으면 장난감을 가져온 아이가 누구한테 줄지 맘대로 정할 수 있대. 우리 애도 솔로몬 노릇이 한 번 해 보고 싶은가봐! 한스, 뭐 좋은 장난감 좀 만들어 줄 수 없어?" 

한스는 그러마고 대답을 했어. 지옥 어린이들은 어떤 장난감을 좋아할까? 한참 생각을 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아서, 그동안 재미삼아 만들어 뒀던 작은 장난감들을 종류별로 큼지막한 가방에 가득 담았어. 그것만으로는 좀 성의가 없는 것 같아서 놋쇠 뱃지를 단 법복과 판사들이 쓰는 하얀 가발을 흉내낸 모자에 앙증맞은 의사봉까지 만들어서 넣어주었지. 악마는 뭘 이렇게 많이 담아줬냐고 싱글벙글하면서 무거운 가방을 질질 끌며 지옥으로 돌아갔어. 한스는 팔아야 할 장난감들을 한꺼번에 줘 버린 바람에, 푸줏간뿐 아니라 빵가게와 우유 배달부에게도 외상을 달아야만 했어. 

악마가 네 번째로 한스를 찾아온 건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어. 한스는 외상값 때문에 고민하던 참이라 이번에는 그다지 악마가 반갑지 않았어. 

"무슨 일이야?" 

"어휴, 내 말 좀 들어봐." 악마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어. 

"글쎄, 한스 네가 만든 장난감이 애들 사이에서 인기 폭발이지 뭐야! 그렇게 많이 넣어줬는데도 우리 아들이 의사봉 몇 번 휘두르기도 전에 가방이 텅 비어버렸어." 

"뭐라고! 설마 또 장난감을 달라는 건 아니겠지?" 

한스가 꼬리를 바짝 세우며 말하자, 악마는 약간 언짢은 목소리로 대꾸했어. 

"왜, 내가 필요한 장난감은 만들어 준다는 조건이었잖아?" 

"하지만 며칠 전에 너무 많이 줘버리는 바람에 남은 장난감이 없어! 당장 팔아야 할 장난감도 부족할 정도라고." 푸줏간 주인, 빵가게 아주머니, 우유 배달부...외상값을 갚아야 할 사람들 얼굴이 한스의 머릿속에 어른거렸어. 

"한스, 한스. 그렇게 초조해하지 마! 아무렴 내가 무작정 장난감들을 뺏어가려고 왔겠어? 난 그렇게 매몰찬 악마가 아니라구!" 한스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악마가 달래듯이 말했어. 

"지금까지는 공짜로 받았지만, 이제부터는 제대로 돈을 주고 살 테니까. 응? 그러면 됐지?" 

"돈을 주고 사간다고...?" 

"그래! 네 장난감이 지금 지옥에서 인기가 많으니까, 질은 조금 낮추더라도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서 팔면 마을 아이들한테 깨작깨작 파는 것보다 훨씬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악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선불금이라며 한스에게 어느 정도의 돈을 주고 갔어. 한스는 일단 그 돈으로 당장의 외상값은 갚을 수 있었지.

악마는 다음날부터 매일매일 찾아왔어. 찾아와서는 지옥 아이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장난감 목록을 들고 죽 읊었지. 한스는 정신없이 장난감을 만들었어. 여태까지는 장난감 하나하나를 예쁘게 장식하고 독특한 기계장치를 고안하느라 장난감 만드는 게 즐거웠는데, 이제는 서로 비슷비슷한 장난감을 빨리 적당히 만드느라 공방에 있는 시간이 괴롭기만 했어. 마을 아이들이 쇼윈도에 진열된 예쁜 장난감을 보고 가게에 들어와도, 그런 장난감은 이제 만들어줄 시간이 없었지.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즐겁게 노는 걸 구경하는 게 삶의 보람이었는데, 지옥으로 보낸 장난감들은 누가 가지고 놀아주고 있는지 한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 한스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어. 이렇게 힘들고 바쁘게 장난감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가게에 외상을 달아야 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는 거야. 공방에서 일하느라 바빠서 예전만큼 식사에 신경을 못 쓰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요 며칠간 수프에 빵조각만 적셔 먹은 건 푸줏간과 치즈 가게, 생선 가게에 외상값을 못 치러서인 게 확실하니까. 혹시 악마가 장난감에 치러주는 값이 너무 적은 건 아닐까? 한스는 넌지시 악마한테 이 얘기를 꺼내봤는데, 악마는 원래 계약대로라면 공짜로 받아야 하는 걸 돈까지 줘가면서 사가 주고 있지 않느냐고 짜증을 낼 뿐이었어. 정 그만두고 싶으면 다시 네 다리로 걸어야 하는 평범한 고양이로 만들어 주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지.

이제 한스가 개성있는 장난감을 만들 때는 악마가 특별히 아들한테 줄 장난감을 부탁할 때뿐이었어. 악마의 아들은 정말 신기한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싶어했어. 가만히 앉아서 어느 집이든 들여다볼 수 있는 망원경, 종이 위에서 휘리릭 돌리면 쓰여 있는 글의 내용이 마음대로 바뀌는 깃펜, 마음에 안 드는 친구 등짝에 붙이면 큰 목소리로 "얘가 그랬대요! 얘가 그랬대요!"하고 외치는 작은 인형, 사람이 타지 않아도 알아서 날아다니는 멋진 비행기......슬프게도 한스는 그런 장난감들을 만드는 것조차 더 이상 즐겁지 않았어. 악마는 그런 장난감들에는 돈을 쳐주지 않았거든. 옛날처럼 장난감에 예쁜 칠을 하거나 작은 톱니바퀴들로 정교한 장치를 만들면서도 한스는 끊임없이 가게들 생각을 했어. 이 장난감을 만들 시간에 차라리 지옥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을 많이 만들면 외상값 갚을 돈을 벌 수 있을텐데. 

먼 옛날에 한스는 털이 희고 뚱뚱한, 풍채 좋은 고양이였어. 하지만 이제 풍성하고 윤기 흐르던 털은 생기를 잃었고,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서 멀리서 보면 푸르죽죽하다는 느낌이 들게 되었어. 장난감을 만드느라 지친 몸과 외상값 생각에 예민해진 신경을 달래기 위해 마시게 된 술 때문에 코는 빨갛게 물들어서 파란 낯빛을 더 도드라지게 했지. 매일같이 한스네 집에 찾아와 장난감을 내놓으라고 닦달해대는 악마는 한스가 작은 인형 하나라도 물량을 못 맞추면 장난감 병정들을 시켜서 한스의 발목을 콕콕 찌르게 했어. 그럴 때면 한스는 한숨을 내쉬며 작업복 앞주머니에서 장난감을 못 만든 만큼 동전이나 지폐를 꺼내서 악마에게 줘야 했어. 가엾은 한스. 마을에서 가장 예쁘기로 유명한 "한스 씨의 놀라운 장난감 가게"에서는, 푸르죽죽한 혈색에 코만 빨갛고, 귀는 늘 납작하게 축 처진 고양이가 앞주머니 달린 치마를 매고, 오늘도 내일도 장난감 만드느라 정신없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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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9

본편로그(앞부분) 2015. 4. 4. 19:16

~짤 그런거 이제 없다...~



"오늘 수업은 내가 할 거야."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




 

야외 수업을 하기로 결정한 일의 후폭풍은 세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셌어요. 그날 오후 수업은 완전히 물 건너갔고, 퇴근한 프레드 씨는 풀죽은 로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나자 한숨을 푹푹 쉬며 이마를 짚더니 내가 젊은이들의 혈기를 너무 우습게 봤다고 중얼거렸지요. 프레드 씨는 윽박지르거나 기나긴 설교를 들려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늘 짓고 있던 미소가 사라진 것만 봐도 세 사람은 죄책감에 입맛이 써지는 기분이었어요. 프레드 씨가 크게 다친 사람이 없으니 그래도 다행이라고 하면서 내보내 주자마자, 카를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어요.

"진짜 쫓겨나는 줄 알았어. 최소한 나는 쫓겨날 줄 알았어."

"걱정마, 프레드 씨가 굳이 한 명만 쫓아낸다고 한다면 원인제공자가 나라고 하면 되잖아. 나 아직 사직서는 안 냈거든......"

카를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에데의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어요. 카를은 프레드 씨의 합격 편지를 받자마자 직장을 때려치고 내친 김에 마음에 안 들던 상사의 양복 엉덩이에 은밀하게 페인트도 묻히고 왔거든요. 흰색으로요. 다음부터는 누가 좀 간지럽혀도 호들갑을 떨지 않도록 평정심과 내성을 길러야겠다고 카를은 다짐했어요.

"내 잘못이야. 나라도 들뜨지 말고 제자리를 지켰어야 했는데."

로자였어요. 카를은 그녀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필사적으로 항변했어요.

"아냐, 그게 왜 너 때문이야! 우리가 밖에 나가자고 조른 바람에 그렇게 된 거잖아."

"그래. 우리 장난에 너까지 말려들어서 혼이 났잖아. 네 잘못이 아냐."

에데도 거들었지만 로자는 고개를 저었어요.

"나는 프레드에게 너희의 선생님 자리를 위임받은 거란 말야. 하루 동안 너희가 한 일은 전부 내 책임인걸. 첫날부터 프레드를 실망시켜 버렸어......"

"진정해, 로자. 아무렴 프레드 씨가 연약한 아가씨가 건강한 청년 두 명을 완벽하게 통제할 거라고 기대했겠어? 넌 오늘 하루 좋은 선생님이었어. 프레드 씨도 우리가 공부한 걸 보면 알아주실거야."

에데가 조근조근 로자를 달랬어요. 카를도 로자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웃어보이면서 말했어요. 

"에데 말이 맞아. 그리고 우린 옷은 이렇게 입었어도 성인이잖아? 중학생이 아니란 말이야. 우리 행동에 대한 책임은 우리가 져야지. 기운 내! 내일은 진짜 얌전히 말 잘 들을게, 마담."

카를의 말에 로자는 그제서야 살짝 웃으면서 고맙다고 했어요.

카를은 그날 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어요. 사실 카를은 그간 로자가 보여준 행동이나 말씨로 보아, 프레드 씨한테 혼난 책임을 밖으로 나가자고 부추긴 에데나 지붕 위에서 에데를 발로 차 떨어뜨린 자기한테 돌릴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지기 싫어하고 얄미울 정도로 이치를 따지는 성격인 것 같았으니까요. 그런 과거의 추측까지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카를은 옆 침대의 에데가 듣도록 나지막히 말했어요.

"난 로자가 우리를 책망할 줄 알았어."

"그래? 난 그럴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래?"

"응."

 에데는 하품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에데도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어요. 지붕에서 떨어져 죽을 뻔하는 등 너무나 피곤한 하루를 보냈으니까요. 어쨌든 이제 두 사람은 로자에 대해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분명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아가씨들보다도 당돌하고 거침없는 말씨를 가졌지만, 그건 그녀가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정직하기 때문일 거라고 말이에요.


 

-----------------------------------------------------------------------------------------



다음날 아침, 카를과 에데는 제 시간에 일어나 렌헨이 아침식사를 차리고 있는 식당으로 내려갔어요. 이번에는 프레드 씨가 먼저 와서 식탁에 앉아있었지요. 두 사람은 프레드 씨의 모습을 보고 잠깐 멈칫했지만, 프레드 씨는 여상스러운 태도로 웃으면서 맞아주었어요. 곧 로자도 도착해서 네 사람이 자리에 앉자, 렌헨이 로자 몫의 접시를 내오면서 짖궂게 말했어요. 

"로자, 일 쳤다면서요? 내가 여럿이서 지붕 소풍 가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내가 일쳤나 뭐! 망아지처럼 뛰어놀다가 떨어진 건 나 아니야, 렌헨."

로자가 약간 발그레해진 얼굴로 반박했어요. 카를은 간밤의 로자에 대한 평가를 좀더 냉정한 쪽으로 수정할 필요를 느꼈어요. 

"렌헨, 3인분이나 도시락을 만들어 준 건 당신이니까 당신도 공범이야. 난 지금껏 로자가 틈만 나면 지붕으로 올라갔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당신은 그 때마다 도시락을 싸줬다면서?"

프레드 씨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지만 약간 피곤하게 들리는 웃음이었어요. 아닌게아니라 어제 저녁 퇴근했을 때만 해도 그러지 않았는데 눈 밑이 거뭇거뭇한게 밤이라도 샌 것처럼 보였지요. 프레드 씨는 빵에 마멀레이드를 바르다 말고 손등으로 눈꺼풀을 누르며 말했어요.

"앞으로 오래 보면서 같이 공부할 사이인데, 어울리면서 친해지는 건 좋은 일이야. 로자 말로는 둘다 열심히 한다니까......" 

프레드 씨는 말하다 말고 크게 하품을 했어요. 

"......실례. 아무튼 공부만 열심히 한다면 쉴 때는 즐겁게 노는게 좋지 않겠어. 위험한 일만 하지 말고......"

프레드 씨가 또 하품을 하자, 에데는 슬슬 프레드 씨의 오늘 하루 회사생활이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로자도 프레드 씨의 하품이 신경쓰였는지, 프레드 씨가 말을 잇기 전에 끼어들었어요.

"걱정 마요, 프레드! 우리 모두 어제 많이 반성했으니까, 오늘은 어제 못한 만큼 더 열심히 할 거예요."

 프레드 씨가 반쯤 감기려는 눈으로 마멀레이드 토스트를 씹으면서 미소지었어요. 타이르듯이 부드러운 말투로, 프레드 씨는 말했어요.

"서두르지 않아도 돼, 로자. 마음을 급하게 먹지 말고, 카를과 에두아르트가 배우는 속도에 맞춰주렴. 난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학습에서 소외되는 건 바라지 않는단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프레드 씨는 어제처럼 단정한 차림으로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어요. 어제보다 발걸음이 느린 듯한 건 아마 기분 탓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눈에 띄게 무거워 보이는 프레드 씨의 뒷모습을 보며, 에데는 은행원 시절 유난히 잔업이 길었던 날들의 기억을 떠올렸어요. 그런 날에는 다음날 아침까지 몸이 무거웠었죠.

"참, 모두에게 전할 말이 있어요."

그릇을 치우던 렌헨이었어요. 막 물컵을 입에 댄 로자 대신 무슨 일이냐고 카를이 묻자 렌헨은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어요.

"카를이 오늘 수업은 자기 방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로자, 결석하면 출석점수 깎을거야?"

"오늘은 진짜로 말 잘 듣겠다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난 카를 씨 좀 무섭단 말이야!"

카를이 필사적으로 속삭였지만 별 수 없었어요. 로자랑 렌헨은 카를 씨가 성격이 좀 급하긴 한데 그렇다고 무서울 건 또 뭐냐고 웃어넘겨 버렸지요. 뜻밖에도 에데는 카를에게 약간 동조해 주었는데─"엄격하고 무뚝뚝한 사람 같긴 하더라. 물론 나 때문에 놀란 직후였던 걸 감안하긴 해야겠지만서도."─아무 권력이 없기로는 카를과 다를 것도 없는 에데의 동조는 냉정하게 말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어요. 세 사람은 결국 서재에 들러 오늘의 교재를 꺼내들고 카를 씨의 침실로 향해야 했지요. 열심히 공부하면 오후에 새로 쿠키를 구워주겠다고 렌헨이 말한 게 그나마 카를에게 위안이 되었어요.

"카를, 우리 왔어요. 들어갈게요!"

로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앉아 있던 카를 씨가 이 쪽을 돌아봤어요. 여전히 쏘아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에, 카를은 어제 서재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 살짝 움츠러들었지요. 에데는 카를 씨의 시선을 피하는 그를 흘끗 보더니, 용감하게도 로자보다 먼저 카를 씨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어요.

"카를 씨, 팔은 좀 어떠세요?"

"덕분에 며칠간은 아무것도 못 쓸 것 같네."

에데와 카를 씨의 대화를 듣고, 그제서야 카를은 카를 씨의 손목에 찜질 주머니가 대어져 있는 걸 눈치챘어요. 에데를 잡아줄 때 인대가 늘어났대, 하고 옆에 있던 로자가 귀띔해 주었어요. 카를은 자기 혼자 몰랐던 게 무신경해 보일까봐 급히 한 마디 하면서 끼어들었어요.

"죄송해요 카를 씨, 저희가 장난을 너무 심하게 치는 바람에...에데를 잡아주셔서 감사해요." 

"그야 당연한 일이지. 자네 친구 목이 부러지는 것보다야 낫잖나?"

"다치셨을 줄은 몰랐어요. 글을 못 쓰게 되셨다니 어떡하죠?"

"난 상관없어. 그 핑계로 간만에 쉴 수 있을 것 같거든. 나보다 프레드가 화내는 걸 걱정해야 할 거야."

카를 씨는 말을 하면서 씩 웃어보였어요. 처음으로 봤던 카를 씨의 미소와는 달리 즐거워하는 느낌이 조금이나마 들어서, 카를은 조금씩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지요. 

"카를하고, 그쪽은 에두아르트랬나?"

"아, 네. 그러고 보니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자기소개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예의 차릴 거 없어, 생략해. 궁금하지도 않으니까. 난 말귀만 잘 알아들으면 어떤 학생이든 상관없거든. 카를, 에두아르트,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의자를 가져오게."

카를과 에두아르트가 각각 방안에 흩어져 있던 의자를 가져오는 동안, 세 사람 몫의 책을 들고 있던 로자가 카를 씨에게 물었어요.

"카를, 내 의자는요?"

"침대 발치에 앉으렴. 등받이는 없어도 오래 앉아있기엔 의자보다 나을 거다."

"수업을 해야 하는데, 여기 앉으면 책상도 필기구도 쓸 수 없겠어요."

카를 씨는 가만히 웃기만 했어요. 카를과 에두아르트가 의자를 가져오고 세 사람이 각자 자리에 앉자, 카를 씨는 책을 치우라고 했어요. 어리둥절한 세 사람한테 카를 씨가 말했어요.

"오늘 수업은 내가 할 거야. 원래는 로자가 할 예정이었지만, 자네들 때문에 무료하게 되었으니 나한테 소일거리를 줘야지."

"카를, 한스 씨 이야기를 직접 해주려는 거군요?"

"이미 들은 얘기라 지루하더라도 티내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로자."

로자는 활짝 웃으면서 손을 뻗어 카를 씨의 손을 잡았어요. 물론 인대가 멀쩡한 쪽이었지요.

"지루하긴요. 카를, 에데, 카를은 이야기를 정말 잘 해. 듣고 있으면 어린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 정도야!"

"<고양이 한스 씨>는 그럼 원래......"

"그래, 구연동화야. 로자가 내가 해주는 이야기 중에서는 이게 제일 재미있다고 하더군."

카를 씨는 두어 번 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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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8

본편로그(앞부분) 2015. 3. 21. 02:39

~짤 준비중~



"청춘의 꽃도 같이 썩어죽게 생겼다고."

<야외 수업>




 

"동화책 아냐 이거?"

책을 들고 앞뒤로 살피며 카를이 말했어요. 설마 내가 너무 수준 낮은 말만 해서 교재 수준을 낮춘 건가 싶어 불안해졌지요. 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어요.

"맞아, 동화책이야. 이거는 지금 읽으라는 건 아니고, 두 번째 숙제. 내일 오전수업까지 읽어오면 돼."

"아까 그 책은 이걸로 끝이야? 좀더 천천히 읽어보고 싶은데."

"제자리에 갖다 놓기만 한다면 마음대로 가져가서 봐도 돼! 그러라고 있는 서재인걸."

로자가 허락하자 에데는 책꽂이로 걸어가 로자가 꽂아놓은 <서쪽 나라 일꾼들의 실태>를 다시 꺼냈어요. 카를은 자기도 그렇게 할 걸 그랬나 싶었지만, 괜히 의식하고 따라하는 걸로 보이긴 싫었기 때문에 일부러 신경쓰지 않는 척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를 훑어보았지요. 아무래도 동화책이다 보니 중간중간 큼직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날카롭고 정돈 안 된 펜선으로 그려진 걸어다니는 고양이는 색조합도 심란하게 칠해져 있어서 어린이용 책 치고는 실험성이 다소 과했지요. 카를도 취미로 그림을 좀 그려본 터라, 얼마나 화가에게 줄 그림값을 후려쳤을까 하는 생각에 한숨부터 나왔어요.

"왜 그래 카를? 생각보다 어려워 보여?"

에데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책을 내리면서 물어봤어요. 카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고 책 내용을 조금 훑어보다가, 지금은 그러면 뭘 해야 하나 싶어 로자에게 물어봤어요.

"이 책은 숙제랬잖아, 나중에 읽으면 되는 거랬지? 그럼 지금은 뭘 하면 되는 거야?"

"으흠, 안 그래도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참이었어. 점심 먹기엔 좀 이른데."

"공부하고 남은 시간엔 쉬면 되는 거 아냐? 로자 넌 평소엔 뭐 하고 놀아?"

"나? 그냥 다른 여자애들이랑 비슷하지 뭐. 책도 읽고, 편지도 쓰고, 가끔은 나가서 꽃이나 새도 보고."

카를이 웃으면서 진짜 평범한 아가씨들은 논다는 말을 그런 뜻으로 쓰지 않는다고 하려던 찰나, 에데가 카를에게 프레드 씨의 책을 내던졌어요.

"그래 그거야! 꽃이나 새 보는거 좋지. 집 밖으로 나가자!"

카를은 얼떨결에 두 손으로 책을 받느라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를 떨어뜨릴 뻔했어요.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에데의 제안은 카를 입맛에 꼭 맞았지요.

"밖으로? 아직 수업시간인데...뭐 좋아, 밥 먹고 공부만 하며 지낼 순 없지."

카를이 맞장구 치자 에데가 미소지으며 주먹을 내밀었어요.

"이래야 내 친구답지." 카를이 에데와 주먹을 마주치자 로자는 팔짱을 꼈어요.

"손발 착착 맞는거 봐! 이봐 에데, 좀전엔 프레드 책이 좀 더 읽어보고 싶다느니 했으면서, 그건 그냥 제스쳐였던 거야?"

"나가서 읽으면 되지. 솔직히 이 서재, 학문이 꽃피기엔 너무 어두침침하잖아?"

"청춘의 꽃도 같이 썩어 죽게 생겼다고. 에데 말대로 하자! 로자, 집 근처에 어디 소풍갈 만한 데 없어?"

"집에 처음 올 때 숲 우거진거 못 봤니? 소풍은 무슨."

로자는 고개를 모로 저으면서도 의자를 집어넣고 일어섰어요. 그리고 카를의 손에서 <서쪽 나라 일꾼들의 실태>를 뺏어 에데에게 흔들어 보이며 말했지요.

"야외수업은 허락해 줄게. 하지만 이건 소풍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업인거, 명심해!"

"너무해, 아까는 쉬는 시간이랬잖아!"

로자는 단호한 손길로 에데에게 동화책을 내밀었어요.

"프레드에게 너희를 가르칠 막중한 책임을 위임받은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줘. 수업 첫날부터 농땡이 피웠다는 평가를 받고 싶진 않다고. 이제부터는 점심 겸 예습시간이야! 간단히 먹을 것 좀 챙겨가서 같이 이 책을 읽는거야."

에데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받아들었어요. 말은 쉬는 시간이 아니라 수업이라니 너무하다고 했지만, 밖에서 식사하며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것 같았지요. 카를은 벌써 동화책을 챙겨들고 서재 문을 열고 있었어요.

"나랑 에데는 이대로 바로 나가면 돼! 로자, 옷 갈아입고 올 거지? 우리가 부엌에 가서 뭐라도 가져올까?"

"아니, 나도 이 차림 그대로 나갈거야. 내가 집 주변에 소풍갈 만한 곳은 없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찾아낸 곳이 있는데, 맨 꼭대기 다락방으로 가면 지붕으로 바로 나 있는 큰 창문이 있어. 거길 통해서 지붕으로 나갈 수 있는데, 거기서 수업할 거야."

"지, 지붕?"

"걱정 마, 경사가 아주 완만해서 씨름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굴러떨어질 일은 없을거야."

 로자는 자기 몫의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를 카를 손에 맡기면서 복도로 나갔어요.

"난 부엌에 가서 렌헨한테 도시락을 부탁할 테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



-----------------------------------------------------------------------------------------



"와, 이거 굉장한데!"

카를은 로자가 일러준 대로 다락방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자마자 탄성을 질렀어요. 집안에 있을 때는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던 주변 경치가 시원하게 트여 보였거든요! 호수처럼 넓게 자리잡은 숲은 느긋하게 경사를 이루며 내려갔고, 그 끝에는 카를과 에데가 떠나온 도시의 지붕들이 펼쳐져 있었지요. 눈을 가늘게 뜨면 좀 더 멀리 공업지대의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도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에데가 다락방에서 가져온 담요를 건네받아 먼지를 털면서, 카를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어요. 

"서재에 책먼지가 은근히 많았나봐, 바깥 공기가 아주 상쾌해!"

"숲속이라 그럴거야, 아마. 기껏해야 몇 마일 안 되는 거리일텐데 도시랑 비교도 안 되게 공기가 깨끗한걸."

에데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자, 담요를 지붕에 전부 깐 카를이 뻗은 손을 잡고 끌어올려 주었어요. 곧 로자가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지요. 로자에게 바구니를 건네받은 카를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어요.

"너 실수한 거야, 로자! 순순히 식량부터 넘겨주다니, 우리가 도시락 욕심에 널 버리고 가면 어떡하려고 그래?"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렌헨이랑 같이 다락방 창문을 못박아 버릴거야."

로자도 피식 웃으며 받아쳤어요. 카를과 에데가 뻗어주는 손을 한 짝씩 잡고 올라온 로자는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며두 사람 사이에 자리잡았지요. 로자가 도시락 바구니를 끌어당겨 흰 보자기를 벗기자, 두 청년은 양옆에서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어요.

"세상에 로자, 이거 전부 렌헨이 만든거야?"

"응, 맞아. 렌헨은 정말이지 우리 집의 집정관이야! 렌헨 없인 카를도 프레드도 아무것도 못할걸."

두꺼운 종이에 통째로 싼 넓적다리 햄과 치즈 덩어리들, 적포도주 병, 아마도 버터가 들어있을 도자기 그릇, 작고 예쁜 휴대용 병에 담긴 나무딸기 잼에다 황금색 껍질이 먹음직스러운 파이까지─카를은 사과파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셋이 먹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칠 만큼 많았지요. 제일 놀라운 건 이제 막 구운 듯 따뜻함이 남아있는 빵이었어요. 빵은 빵가게에서 사먹는 건줄로만 알았는데! 에데는 동그라니 먹음직스러운 빵을 집으려다 혹시나 싶어서 재킷 자락에다 손을 문질러 닦았어요. 로자는 어느새 익숙한 손길로 코르크 마개를 따고 있었지요. 

"잔 챙겨오는 걸 깜빡했네. 렌헨이 보면 화내겠지만, 그냥 입 대고 마셔."

"이야아, 이거 대담한 아가씨네? 설마 카를 씨나 프레드 씨의 수집품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무슨 소리야! 이건 내 용돈을 쪼개서 산 거거든? 나도 와인은 하루 한 잔씩만 마시는데 특별히 너흴 위해서 가져온 거야! 고맙게 여기진 못할 망정!"

로자는 깔깔 웃으며 코르크 따개로 카를의 옆구리를 쿡 찔렀어요. 으윽, 로자리우스 너마저...카를은 거품 무는 흉내를 내며 에데가 정성스레 잘라 놓은 치즈 한 조각을 쏙 집어먹었어요.

"야, 카를! 로자리우스, 저 도둑놈을 해치워 버려!"

"우물우물....너희들의 알량한 버터칼로는 이 카를 님의 겉옷 한 장 잘라낼 수 없도다....아, 이거 사과파이네"

시끄럽게 떠들고 까불며 놀다 보니 어느새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어요. 산처럼 많아보이던 도시락도 어느새 햄 덩어리를 빼곤 거의 다 먹어치워 버렸지요. 따뜻한 오후 햇살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어서, 카를은 그만 지붕 위에 드러눕고 말았어요.

"졸리다..."

"카를, 자면 안돼! 한스 씨 이야기 읽기로 했었잖아!"

"한스 씨도 이렇게 볕 잘 드는 지붕에 올라오면 낮잠이 자고 싶을거야..."

"한스 씨는 고양이니까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넌 사람이잖아! 에데, 카를 좀 일으켜 세워봐!"

"카를~ 얼른 일어나! 일어나서 공부하자! 이번엔 나한테 이겨봐야지!"

에데는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와인 때문인지 발그레해진 카를 뺨을 손바닥으로 챡챡 쳤어요. 카를은 진짜로 잠든 건지 잠든 척 두 사람을 놀리는 건지, 냠냠 입맛만 다시고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지요. 카를의 능청스러운 얼굴에 에데의 눈빛에도 장난기가 돌았어요.

"좋아, 잠든 척이 얼마나 오래가나 보자구!"

에데는 살그머니 상체를 숙여 카를의 스웨터를 끌어올렸어요. 카를의 배 위로 드러난 연회색 셔츠에 에데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생각이 미치자, 로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데를 말리려 했어요. 

"에데 잠깐만, 여긴 지붕 위니까..."

"으핫, 아하하하하학!!"

"후회하기엔 늦었어, 어디 맛 좀 봐라!"

로자가 말릴 새도 없이 에데는 카를의 배를 무자비하게 간지럼 태웠어요. 예상치 못한 공격에 카를은 자지러지게 웃으며 긴 팔다리를 휘저었지요. 에데는 카를의 발차기를 피하려다 그만 중심을 잃고 기우뚱 흔들렸어요.

"어, 어어어!"

"에데!"

카를이 다급하게 팔을 뻗었지만 에데의 몸이 굴러떨어지는게 빨랐어요.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비명소리와 함께 자기 눈을 가리는 로자의 하얀 손이 눈꺼풀 뒤로 사라지자마자 에데는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걸 느꼈어요. 귓속이 물이 들어찬 것처럼 멍해지고,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는 천천히 눈을 떴어요. 

"헉, 후우, 하아..."

멍해진 귀에 소리가 다시 돌아오자마자 금방이라도 숨 넘어갈 듯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어요. 다리가 의지할 데 없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는 걸 인식하자, 본능적으로 비어있는 손이 쇠창살을 움켜쥐었어요.

"허억, 뭐, 해, 멍청아...! 얼른 딛고, 올라서지, 않고....!"

에데는 허겁지겁 다리를 발코니 바닥으로 끌어올렸어요.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발코니 창살에 가슴을 걸치는 데 성공하자, 손을 잡아준 사람이 에데의 멜빵을 잡고 상체를 창살 안으로 잡아당겼어요. 간신히 발코니로 올라온 에데가 다리가 떨려 그 자리에 무릎을 꿇자, 그 사람도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어요. 에데는 아직도 그 사람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땀범벅이 된 손을 화들짝 놓았어요.

"가, 감사합니다..."

에데가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지만, 그 사람은 숨만 쉬기에도 벅찬지 센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도 하지 않았어요. 대신에 지붕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카를만이 어쩔 줄 몰라하며 중얼거렸지요.

"카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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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7

본편로그(앞부분) 2015. 3. 3. 15:16

~짤 준비중~



"부자라는 말은 그만 쓰도록 하자."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




 

"좋아, 카를. 프레드의 책을 읽으면서 근사한 대답이 떠올랐는데, 문을 열자 집주인 카를과 마주치는 바람에 깨끗이 잊어버렸다 이거지."

"바로 그거야."

"변명을 하려면 좀 더 창의적으로 해 봐!"

로자의 허탈하다는 듯한 말투에 카를은 어깨를 으쓱했어요. 변명이 아니라 사실인걸요. 한참을 잊고 있었던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오는 위압적인 외모의 집주인보다 더 집중을 방해하는 존재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요?

"나도 노력은 했어. 평소에 스스로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상식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데까진 생각해 봤지. 어, 음, 그리고, 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순 없다는 생각도 들었달까..."

사실 마지막 문장은 적당히 주워섬긴 거였어요. 보통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건 교회이기 마련인데, 프레드 씨의 책에는 교회 얘기가 없었기 때문이죠. 뜻밖에도 로자는 카를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표정을 폈어요.

"제법인데, 카를! 아주 게으름 피우던 건 아니었나봐? 맞아,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하지. 교회의 사제들 말에 충실하게 살면 신이 그들을 구원해줄 거라고 생각하거든. 힘든 현실을 잊게 해주는 마약 같은 거야. 실제로는 신은 허상일 뿐이고 사제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받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동맹군 중 한 사단일 뿐인데 말이야."

자기가 하려던 말은 그냥 교회에서 주는 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얘기였는데, 어쨌든 로자가 좋아하니 다행이라고 카를은 생각했어요. 로자의 말도 과격하고 처음 들어보는 소리이긴 하지만 아예 있을 수 없는 얘기는 아닌 것 같았지요. 카를과 다른 개구장이 아이들을 귀여워해 주시던 동네 목사님의 상냥한 얼굴이 떠올라서 좀 죄송스럽긴 했지만요.

"그래, 인간은 신이 만든 게 아니라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거니까.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신의 힘을 믿고 기대기엔 과학이 너무나 발달해 버렸어."

카를은 그럴듯하게 덧붙였지만 사실 로자의 말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어요. 사제들이 "동맹"이라는 건 무슨 말일까요? 몇몇 부패한 사제들(특히 옛날식 사제들 말이죠!)을 제외하고, 선량하고 검소한 보통 사제들이 대체 누구와 손을 잡고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는 건지 카를은 짐작도 할 수 없었어요. 교회가 사람의 의식주를 도와주지 못할 수는 있어요. 땅 위에는 천국도, 신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착하고 바르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 아니겠어요? 애초에 교회의 본래 목적은 사람들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걸 돕는 건데 말이에요.

카를이 두 사람 모르게 교회와 사제들에 대한 생각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로자는 에두아르트에게도 질문을 던졌어요.

"에데도 말해봐. 책을 읽으면서 뭔가 새로운 걸 발견했어? 너랑 카를의 말 중에서 틀린 곳이 있었니?"

에데는 로자가 가리키는 칠판의 글씨들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어요.

"내가 부자들이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보다 나쁜 게 아니라고 한 건 여전히 맞다고 생각해. 세상엔 로빈 이야기에 나오는 나쁜 영주같은 부자는 많지 않아. 대부분은 성실하게 자기 할 일을 하며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살리고 일꾼들에게 급료를 주는 평범한 이웃들이지. 

하지만 프리드리히 씨의 말도 틀리지 않아. 공장이나 회사를 가진 부자들은 나쁜 의도가 있든 없든, 결과적으로는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데?"

"...열심히 일하는 건 일꾼들인데, 돈을 버는 건 부자들이니까?"

에데는 자기가 말해 놓고도 좀 유치한 말인 것 같아 살짝 머쓱해졌어요. 물론 열심히 일한 건 일꾼들이지만, 밑천을 들여 일거리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건 공장이나 회사의 주인들인걸요. 은행에서 일하면서 많이 봤지만, 워낙 큰돈이 밑천으로 들어가다 보니 사장 노릇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두 사람이 가만히 있자 에데는 자기가 한 말을 수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음, 방금 건 좀 이상했어. 밑천이 크면 돈을 많이 버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이상하지 않았어, 에데. 조금 전에 한 말이 맞아. 카를도 같이 생각해 봐. 밑천을 댄 사람이 돈을 많이 버는게 옳을까? 아니면 일을 열심히 한 사람이 돈을 많이 버는게 옳을까?"

"그야 돈낸 만큼 벌고 일한 만큼 버는 게 맞는 거 아냐?"

"보통은 네 말대로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카를. 그럼 얼마만큼이 '돈낸 만큼'이고 '일한 만큼'인지는 누가 정하는 걸까?"

"글쎄, 부자들이겠지." 카를이 대답했어요.

"적어도 일꾼들이 정할 것 같지는 않은데." 월급날 받던 빠듯한 액수를 떠올리며 에데도 거들었어요.

"좋아, 좋아. 많이 발전했어. 이쯤에서 우리 부자라는 말은 그만 쓰도록 하자."

로자의 다소 갑작스런 제안에, 카를은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양손을 들어보였어요. 에데도 말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요. 로자는 듣기 좋게 또박또박 설명해 줬어요.

"너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익숙한 표현을 썼는데, 슬슬 정확히 해둬야지. 공장이나 회사를 갖지 않고도 부자인 사람들이 있으니까 말이야. 작은 공장이나 회사를 가진 사람들은 생각보다 부자가 아니기도 하고. 게다가 부자와 빈자라는 표현은 그 둘을 가르는 기준도 너무 애매해. 지금부터는 자기 밑천을 들여 공장이나 회사를 소유한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물주'라고 하는거야."  

"물주...말이지." 카를은 공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단어를 되풀이했어요. "좋아, 외웠어."

"슬슬 주제가 헷갈리기 시작하는데, 우리가 얘기하던 데로 돌아가 보면 안될까? 부자, 아니 물주들이 나쁜지 아닌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 에데가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보다 물주들이 돈을 많이 버는 건 나쁜 일이라고 얘기했어. 그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착한 사람들이고, 나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말이야. 그럼 이제, 왜 그게 나쁜 일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차례야. 에데, 네가 말을 꺼냈으니 왜 그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말해줄래?"

"그건..."

에데는 다시 말문이 막혔어요. 사실 그다지 학문적이지는 않은, 단순한 느낌에 따라 말한 것일 뿐이거든요. 로자와 카를과 이야기하면서도 우유병을 깨뜨려서 내일은 다시 오지 않을 꼬마 배달부, 그 소년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어요. 만약 그 마른 아이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도 고용주가 정한 작은 액수의 수당만 받으며 고달프게 살다 이윽고 일을 못할 만큼 몸이 약해져서 죽는다면...

"...공평하지 못하니까."

에데의 말에 카를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어요.

"그럼 물주들이 일꾼들과 함께 번 돈을 모두 모아 서로에게 똑같이 나눠줘야 한다는 거야? 그러면 공평하다는 거야?"

"그럼 프리드리히 씨의 책에 나온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검댕투성이가 되어서 일하다가 부자가 되어보지도 못하고 일찍 죽어버려도 된다는 거야? 그 사람들도 처음부터 밑천을 갖지 못했다는 걸 빼면 물주들이랑 똑같이 평범한 이웃들인데, 이게 공평하단 말이야?"

"만약 어떤 물주가 원래는 일꾼이었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자기 공장을 차린 거면 어쩔건데? 그걸 뺏어서 아직도 가난한 다른 일꾼들한테 줄 거야? 설령 일꾼이 돈을 벌어서 물주가 된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물주 집안에 태어났다고 해도 그건 안 돼. 훔친 게 아니라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게 죄는 아니잖아. 일꾼들이나 물주들이나 죄짓지 않은 선량한 사람들인 건 마찬가지야! 모두들 법으로 재산을 보호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법이야말로 모든 사람한테 공평한 사회의 기준 아니었어?"

카를은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었어요. 저도 모르게 어느새 큰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죠. 만사에 느긋하고 싸움을 싫어하던 자신이 만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친구한테 이렇게 몰아붙이듯이 말을 하다니. 에데가 혹시나 기분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돼서, 카를은 슬쩍 에데의 눈치를 봤어요. 에데가 기가 죽었거나 화를 내고 있으면 재빨리 사과할 셈이었죠. 에데는 살짝 눈썹을 찡그리고 아래를 보고 있었어요. 역시 기분이 나빴구나 싶어서 카를이 미안하다고 하려던 차에, 에데가 고개를 들었어요.

"만약에 법이 공정하지 못하다면? 실제로는 나쁜 결과를 불러오는 일인데 법으로 처벌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걸 지켜주는 법을 만든 거라면? 카를, 프리드리히 씨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라."

에데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지만 점점 목소리가 들뜨고 빨라졌어요. 후다닥 말을 마치고 나서는 두 사람이 말하는 걸 지켜보고 있던 로자 쪽을 돌아봤지요.

"로자, 내 말이 맞는 것 같아?"

로자는 생긋 웃었어요.

"첫 숙제치고는 괜찮은걸."

에데는 겸손하게 웃어보였어요. 은행에서 상사나 손님들에게 칭찬을 들을 때마다 지어서 익숙한 표정이었죠. 로자에게 미소로 답례를 표시하고, 에데는 허를 찔린 듯 멍하니 있던 카를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어요. 

"법이라는 힌트 고마워, 친구!"

"뭐, 뭘..."

"너무 기죽지 마, 카를. 에데의 대답도 완벽했던 건 아니니까. 내가 보기엔 운이 좋았어."

로자가 <서쪽 나라 일꾼들의 실태>를 책꽂이에 밀어넣으며 말했어요. 로자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지만, 카를은 역시 조금은 아쉬웠어요. 로자가 말한 대로 상식을 깨보려고 했는데, 결국 카를은 법은 옳은 것이라는, 상식이라기에도 다소 부족한 틀에 갇혀 실패한 셈이니까요. 중학교에서도 아주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는데, 첫 수업부터 이래서야 앞으로 잘 따라갈 수 있을지 카를은 살짝 걱정이 되었어요.

"생각도 연습이 필요한 법이거든. 오늘부터 며칠간은 쉬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하는 연습을 하는 단계야. 체육으로 따지면 준비운동 시간인 거지."

로자는 책꽂이의 다른 칸을 향해 걸어가더니, 큼직한 책을 역시나 세 권 꺼냈어요. 첫 번째 책처럼 살짝 빛이 바랜 표지에는, 알록달록한 그림과 함께 큼지막한 활자로 제목이 적혀 있었어요.

<고양이 한스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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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6

본편로그(앞부분) 2015. 2. 11. 02:58

"그 애는 다시 안 올거야, 에데."

<첫 번째 숙제>




 

에데는 책을 가볍게 넘겨보며 복도를 걸었어요. 특별히 갈 곳이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저 걸으면서 책을 읽는게 편했을 뿐이에요. 은행에서 가만히 앉아 몇 시간이고 숫자랑 씨름하던 에데에겐 가벼운 산책이 사색하기에 딱 좋은 취미였거든요. 에데는 발걸음에 맞추어 생각했어요. 돈이 없는 사람은 불쌍하고, 돈이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는 게 당연한 일 같은데. 크리스마스면 은행 앞에 놓인 구세군 냄비에 돈이나 옷꾸러미를 넣던, 모피 코트를 입은 아가씨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갔어요. 로자는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걸까요? 

그 때였어요.

쨍그랑!

집 밖에서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에데는 반사적으로 창가로 달려갔어요. 밖을 내다보자, 사방에 하얀 액체가 튀어있는 가운데 한 아이가 서 있는 것이 보였어요. 아무래도 우유병을 깨뜨린 것 같았지요. 에데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대문을 열었어요.

"아..."

아이는 에데를 보자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푹 숙였어요. 떨어진 우유병 때문에 무릎까지 우유로 흠뻑 젖어있는 꼴이 안쓰러워 보여서, 에데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물어봤어요. 

"이 집에 배달하려던 우유니?"

"네, 맞아요."

망연자실해 있던 아이는 에데의 말에 반짝 정신을 차린 듯, 우유 웅덩이 속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주워모으기 시작했어요.

"우유는 내일 다시 배달해드릴게요. 죄송해요."

대금은 제가 치를 테니까... 아이는 힘 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다시 유리조각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어요. 에데는 급히 아이를 말렸어요.

"깨진 유리는 위험해! 내가 치울테니 잠깐 앉아있어. 많이 힘들어 보이네."

정말이지, 아이의 초췌하게 패인 눈이나 말라붙은 입술은 보는 쪽이 다 힘이 빠질 만큼 처량해 보였어요. 어디 사는 아이인지는 모르지만, 숲속에서 마차를 타고 한참이나 달려야 나오는 이 집까지 무거운 우유병을 들고 오느라 고생했을 모습이 눈에 선했죠. 

"괜찮아요, 시간이 많이 늦어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이는 바구니가 달린 묵직해 보이는 통까지 등에 지고 있었어요. 이 집 말고도 들러야 할 집이 많아보였지요. 에데는 문득, 이렇게 우유를 잔뜩 짊어지고 아침부터 배달을 다녀야 하는 아이한테 쏟아버린 우유 값을 치를 돈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금만 기다려."


----------------------------------------------------------------------------------------


에데가 서재를 나간 다음, 카를은 한참을 책을 붙잡고 씨름을 했어요. 돈이 없는 사람들이 불쌍한 건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돈이 많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일까요? 그럼 이 집의 주인인 프레드 씨부터 나쁜 사람이 될 게 틀림없지요. 설령 돈을 많이 갖고 있는게 나쁜 일이라곤 해도, 그렇다면 어쩌라는 말인가요? 돈 많은 사람들한테서 돈을 뺏어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기라도 하란 말인가요?

"아, 이거 교회에서 하는 일이잖아?"

하지만 그건 교회니까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가난한 사람이 자기한테 돈이 없다고 돈 많은 사람들한테서 돈을 뺏는다면 그건 강도질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프레드 씨의 책에 교회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어요. 로자한테 말했던 것처럼, 프레드 씨가 직접 부자들의 멱살을 잡아줄 것 같은 느낌만 들었지요. 프레드 씨는 옛날 이야기 속의 로빈이라도 될 셈인 걸까요?

끙끙대던 카를은 문득 로자의 숙제를 전혀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를이 로자한테 했던 말은, 자기한테 떠오른 생각을 솔직하고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었지요. 지금 카를이 하고 있는 생각도 평소 카를의 상식과 어긋나지 않는, 솔직한 카를의 생각이었어요. 

'진실도 처음에는 상식의 껍질 밑에 숨어있는 법이지'

로자의 말이 떠올랐어요. 카를의 상식에 기반을 둔 생각은 새로울 게 없는 생각이지요. 방을 나가던 에데의 뒷모습도 떠올랐어요. 새로운 생각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지요. 함께 이야기를 나눌 다른 사람도 없는 이 방에서라면, 더더욱 밖으로 나가야 했어요. 진작 에데처럼 할걸. 카를은 살짝 후회하며 방문을 열었어요.

"...넌 누구지?"

문 밖에는 뜻밖에도 사람이 서 있었어요. 구레나룻과 목덜미 쪽이 약간 거뭇한 것 빼곤 온통 새하얀 머리카락은 중구난방하게 뻗쳐 있었고, 새카만 눈썹과 사정없이 쏘아보는 눈빛이 무시무시해서 카를은 등골이 서늘했어요. 이 남자는 카를을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카를은 직감적으로 눈앞의 이 사람이 집주인 카를 씨라는 걸 알 수 있었죠.

"오, 오늘부터 이 집에서 후원받게 된 카를...입니다."

카를 씨는 짙은 눈썹을 의미심장하게 찌푸렸어요. 얹혀사는 쪽의 카를은 슬쩍 눈을 들다가 자기를 훑어보는 듯한 집주인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어요.

"흠, 민나의 아들이군."

"어머니를 아시나요?!"

"자넨 모친이랑 좀 닮았나?"

카를은 혼란에 빠졌어요. 정체 모를 후원자가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는 사이였다는 것도 너무나 뜻밖인데, 갑자기 이런 영문 모를 질문을 하다니요. 닮았냐는 건 또 무슨 소리일까요? 얼굴 얘기일까요?

"그런...것 같지는...않은데요."

카를 씨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어요.

"자네 모친께 좋은 일이네. 여기서 할 일이 끝났다면 나가주겠나? 서재에 책을 찾으러 온 거라서 말이야."

카를 씨는 복도 쪽으로 정중하게 팔을 뻗었어요. 원래도 나가려던 참이었지만 어쩐지 얼떨결에 쫓겨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카를은 로자의 숙제도 잊어버리고 닫힌 서재 문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어요.


----------------------------------------------------------------------------------------


"미안해, 오래 걸렸...어라?"

에데는 한 손에 우유가 든 컵, 다른 손에 몇 닢의 돈을 들고 대문을 열었어요. 하지만 우유가 스며들어 검게 젖은 땅과, 미처 줍지 못한 듯 곳곳에 박혀 반짝이는 작은 유리조각을 빼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우유 값을 내 주려고 했는데, 아이는 바쁘다더니 금방 떠나버린 모양이었어요.

"이거라도 마시고 가면 좋았을텐데..."

도시의 기숙사에서였다면 금방 찾았을텐데, 어제 막 도착한 집의 부엌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마침 어느 방의 침구를 정리하고 있던 렌헨을 찾아내 우유 한 잔 따라달라고 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말았죠. 내일이면 그 아이가 다시 우유 배달을 올테니까, 그때라도 줘야겠다. 에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들고 있던 우유를 마셨어요.

"그 애는 다시 안 올 거야, 에데."

맛나게 우유를 마시던 에데는 깜짝 놀라 돌아봤어요. 어느 새 로자가 나타나 대문에 기대어 서 있었어요.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아니, 그보다...안 온다는 게 무슨 소리야."

"그앤 지난번에도 한 번 우유병을 깼었거든. 주인이 한번은 봐 줘도 두 번이나 손핼 보려고 하진 않겠지."

"우유 값만 메꾸면 될 거 아냐!"

"너 같으면 같은 값에 병도 안 깨뜨리고 발도 날랜 건강한 아일 고용하겠니? 아니면 우유 배달 아니면 할수 있는 일도 변변히 없을 것 같은 그 애를 계속 두고 쓰면서 손해를 감수하겠니?"

로자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어요. 에데는 절망적으로 손바닥 위의 동전을 내려다봤어요.

"우유 배달 일당이 얼마나 한다고..."

"소를 키우는 목장 주인도, 우유를 가공하는 공장 주인도 부자는 아니야. 다른 목장과, 다른 공장과 경쟁해서 살아남으려면 조금의 비용이라도 아껴야 하지."

"하지만...그건 너무..."

"나쁜 짓인 것 같아? 부자들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내가 그렇게 말했지."

"너한테 평범한 사람들에게 평범함 이상의 자비심을 강요할 권리가 있니? 너 하나의 호소로 그것을 이끌어낼 능력이 있니?"

"아니."

"그래서 네 말은 틀렸다는 거야, 에데."

두 사람은 가만히 우유병이 흩어진 땅바닥과, 작은 일꾼이 우유를 짊어지고 사라졌을 숲속을 바라보았어요. 로자의 단어는 차가웠어요. 하지만 에데는 로자의 말에 마음 상하지는 않았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따뜻하고, 그리고 지금의 에데의 마음처럼, 슬펐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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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5

본편로그(앞부분) 2015. 1. 4. 03:26

"꼭 여기서 하란 얘긴 없었잖아?"

<첫 번째 숙제>




 

탄광에서는 4, 5, 7세의 아이들도 일하고 있지만, 대체로 8 이상이다. 그들은 채굴된 광석을 막장으로부터 마차 도로나 수직갱까지 옮기기 위해, 혹은 광산의 부분을 구획짓는 환기문을 일꾼들과 광석들을 들여보내기 위해 열거나 닫기 위해 고용되고 있다광산·탄광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은 일주일 간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기 위해 일요일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는 일반적이다. 교회나 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거의 없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공부를 하고픈 마음은 있으면서도 지독하게 졸려하는 까닭에 반응이 둔하다고 교사들은 한탄한다

(...)

탄광의 일꾼들은 일하면서 무리한 자세를 강제당하고 있기 때문에 체질이 허약해지고, 다리가 굽으며, 무릎이 안쪽으로, 발이 바깥쪽으로 굽고 척추도 구부러지기에  사람 탄광의 광부가 섞여 있어도 바로 알아볼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의사마저 그렇게 주장한다.

(...)

유아 때부터 매일 12시간 혹은 이상, 바늘 머리를 만들거나 톱니바퀴와 줄로 광을 내거나, 밖에 각종 서쪽 나라의 일꾼다운 상황 하에서 생활해온 사람이, 30대가 되었을 얼마나 인간적인 감정과 능력을 지켜낼 있단 말인가?

(...)

모두가 타인을 먹이로 삼고, 때문에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소수의 강자, 물주들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지며, 다수의 약자 가난한 이들에게는 근근한 생활수단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 

그들은 당신들에 대해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자칭하지만,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들이 당신들의 괴로움에 조금이라도 진지한 주의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

강제노동은 가장 가혹하고 무엇보다도 굴욕적인 고통이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것만큼 소름돋는 일은 없다.



 

 

책은 두껍진 않았지만 아주 얇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고발적인 문체와 자극적인 내용은 읽기에 편해서로자가 읽을 부분을 골라 주지 않았더라면 앉은 자리에서 읽을 수도 있을 같았지요. 읽고 나서 에데는 눈썹을 찡그렸어요.

"끔찍하네. 진짜로 이렇게까지 사람을 부려먹는단 말야?"

"그것도 그렇지만, 뭔가 프레드 씨가 같지가 않아."

"프레드라고 해도 된다고 없어! ...하지만 프레드가 같지 않다는 데엔 동의해."

"그치그치! 프레드 씨는 온화한 사람 같던데, 책의 글쓴이는 당장이라도 많은 사람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 같단 말이야."

 로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를이 다소 호들갑스럽게 반응했어요.

"프레드 ,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지도 않잖아. 그런데 이 책은 아주 낡아 보이는걸! 이게 정말 프레드 씨가 책일까? 어쩌면 대필작가가 걸지도..."

"카를, 소설 그만 쓰고 공부로 돌아와! 지금 중요한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프레드는 보기보다 나이가 많댔어."

" 살이신데?"

"에데, 너까지! 나도 정확히는 몰라. 프레드는 절대 자기 나일 얘기해 주지 않는걸. 프레드가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도 카를이 얘기해 거야."

"후원자 카를 말이지?"

"그래, 아니면 누구겠어. 이제 진짜로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 카를을 실망시켜서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열심히 공부해야지. 카를, 에데. 책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어?"

로자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카를은 슬쩍 시선을 피하다가 도움을 청하듯이 에데 쪽을 보았어요. 에데가 저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카를은 다시 로자를 보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어요.

"글쎄, 무슨 생각이라기보단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가난한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상하겠지?"

" 살짜리 어린애라도 그건 알겠다. 좀더 구체적인 감상은 없어?"

로자는 핀잔을 주며 에데 쪽으로 눈치를 주었어요. 하지만 에데라고 해서 특별히 뾰족한 생각이 있는 아니었어요

"프리드리히 씨는 공장이나 회사를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하고 싶은 같던데. 그런데 어디까지 진짜인지 솔직히 모르겠어. 예전 고객들 중엔 부자들도 많았지만, 사람들이 특별히 가난한 고객들보다 나쁘게 느껴지진 않던걸."

"오히려 신사적이면 신사적이었지...그리고 일꾼들이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 가난하니까 부자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아냐? 애초에 가진 많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열심히 일할 리가 없잖아. 그런데 프레드 씨는 시종일관 부자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서 재산을 훔쳐간다고 하니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

에데의 말에 힘을 얻은 카를도 의문을 제기했어요. 사람의 반응에, 로자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어요.

"흐흥, 밝혀지고 후엔 당연해 보이는 진실도 처음에는 상식의 껍질 밑에 숨어있는 법이지. 껍질을 벗겨내고 진짜 모습을 발견하는게 어렵기 때문에 카를이 대단한 사람인 거야. 그러면 에데, 카를, 다음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자습시간을 줄게. 그동안 간단한 숙제를 내줄거야."

숙제라니! 중학교에 다닐 때나 해봤지 이후엔 구경한 적도 없는데. 카를이 우는 소리를 해도 아랑곳 않고 로자는 칠판에 백묵으로 글씨를 써내려갔어요. 에데는 그게 카를과 자신이 방금 전에 말한, <서쪽 나라 일꾼들의 실태> 대한 짤막한 감상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는 깨달았어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사람의 말을 옮긴 , 로자는 위에다 좀더 글씨로 이렇게 썼어요. '어디가 틀렸을까?'

"좀더 차근차근 프레드의 책을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있을거야. 그럼 1시간 후에 !"

로자는 금세 서재 문을 열고 나가버렸어요. 미간을 찌푸리며 책을 펴던 카를은, 에데가 로자 뒤를 따라 나가려는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숙제 , 에데?"

카를의 말에 에데는 이쪽을 돌아보면서 손에 프리드리히의 책을 들어보였어요.

" 여기서 하란 얘긴 없었잖아?"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고, 카를은 소리를 내며 책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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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r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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